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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사성어사전 / 나 ~ 마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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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난형난제(難兄難弟) //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물 의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려움의 비유. 出典世說新語德行篇

 

양상군자(梁上君子)”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진태구(陳太丘)가 낭능후(郎陵候)를 지낸 순숙(筍淑)의 집을 아들 진기(陳紀 : 元方)와 진심(陳諶 : 季方), 진군(陳群 : 長方)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약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숙은 어린 막 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부름을 시켰다. 이 때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덕성(德星)이 동쪽 순숙의 집에 다 모여 있다.”라고 했다.

 

한번은, 진식(陳太丘)이 친구와 어디를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워낙 늦어 먼저 출발했는데 늦게 온 친구가 진식을 욕하자 그 때 진기(陳紀 : 元方)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서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시고는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제 오셨으니 손님과 제 아버지 중 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진식(陳太丘)을 찾아왔던 사람은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내 사과하려 했으나 어린 진기(陳紀 : 元方)는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또 한번은 사촌간인 진기(陳紀 : 元方)의 아들과 진심(陳諶 : 季方)의 아들 사이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인 진식(陳太丘)에게 와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진식(陳太丘), “원방(元方)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말했다 한다.


 

35. 남가일몽(南柯一夢) // 꿈과 같이 헛된 한 때의 부귀 영화. 出典南柯記異聞

 

()나라 9대 황제인 덕종(德宗 : 780-804) 때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서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駙馬)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南柯) 태수를 제수(除授)받고 부임했다. 남가군을 다스린 지 20, 그는 그 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宰相)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檀羅國軍)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遷都)해야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태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遷都)해야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동의어남가지몽(南柯之夢), 남가몽(南柯夢), 괴몽(槐夢)

유사어한단지몽(邯鄲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36. 남귤북지(南橘北枳) //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 으로, 사람은 환경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된다는말. 出典晏子春秋

 

춘추시대 말기, ()나라에 안영(晏嬰)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

 

()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 ()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機智)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동의어귤화위지(橘化爲枳)


 

37. 남상(濫觴) // 사물의 처음. 시작. 出典筍子 孔子家語

 

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 : 長江)은 사천(泗川)땅 깊숙히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모든 일은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子路)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 아 입었다고 한다.

 

筍子孔子家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子路가 옷을 잘 차려입고 孔子님을 뵈었다. 그러자 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 옷자락은 무엇이냐? 옛날에 강은 민산(岷山)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처음에 나옴에 그 근원은 가히 써 술잔에 넘칠 만하였다. 그러나 그 강의 나루에 이르러서는, 배 를 늘어놓지 못하고 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건너지 못하였다. 오직 下流에 물이 많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너도 의복을 이미 하게 차려 입고 얼굴빛이 충만되었구나. 천하에 장차 누가 즐겨 너에게 간하랴!”

 

子路盛服見孔子 孔子曰 由 是裾裾何也 昔者江出於岷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 乃其至江津 不放舟不避風 則不可涉也 非唯下流水多邪 令女衣服旣盛 顔色充盈 天下且孰肯諫女矣.

 

유사어효시(嚆矢), 권여(權與)


38.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곧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 도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 出典史記平原君列傳

 

전국시대 말엽, ()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군(平原君 : 趙勝)을 초()나라에 보내어 구원군(救援軍)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대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것은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毛遂)20번째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 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어추처낭중(錐處囊中)


 

39. 누란지위(累卵之危) // 몹시 위험한 형세. 出典史記范雎列傳

 

전국시대, 세 치의 혀[]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遊說)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무두 책사(策士) · 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 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

 

()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須賈)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謀士)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위태롭다.(危於累卵)’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후 范雎[張祿]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동의어위여누란(危如累卵)


40. 다기망양(多岐亡羊) //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 진리를 얻기 어려움. 방침이 많아 도리어 갈 바를 모름. 出典列子說符篇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와 관계되는 이야기이.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楊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하도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多方面)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 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동의어망양지탄(亡羊之歎)

유사어독서망양(讀書亡羊)


41. 다다익선(多多益善) // 많을수록 더욱 좋음. 出典史記淮陰候列傳

 

()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候)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漢 高祖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高帝嘗與韓信言諸將能否 各有差 上問曰 如我能將幾何 臣曰 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曰 臣多多而益善耳.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將帥)의 장수(將帥)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동의어다다익판(多多益辦)


42. 당랑거철(蟷螂拒轍) //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반항함. 출전韓詩外傳 / 文選

 

⑴《韓詩外傳(券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莊公 : BC 794-731) 때의 일이다.

 

어느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蟷螂之斧]’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 맹랑한 놈이로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가 대답했다.

사마귀[蟷螂]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을 모르는 놈이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 가도록 하라.”

 

⑵《文選에 보면,

 

蟷螂拒轍은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陳琳)이란 사람이 유비(劉備) 등 군웅(群雄)에게 띄운 격문(檄文)에도 나온다.

 

조조(曹操)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 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袁紹)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蟷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

 

동의어당랑지부(螳螂之斧), 당랑당거철(蟷螂當拒轍), 당랑지력(螳螂之力)

유사어당랑규선(螳螂窺蟬)

 

 

43. 대기만성(大器晩成) // 크게 될 사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

出典三國志魏志 / ‘後漢書’ / 老子

 

⑴《三國志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大器晩成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後漢書에 보면,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 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⑶《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隔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동의어대기난성(大器難成)

유사어대재만성(大才晩成)


44. 도원결의(桃園結義) // ‘의형제를 맺음이란 뜻. 出典三國志演義

 

전한(前漢)은 외척(外戚)에 의해 망했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황건적(黃巾賊)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에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태평도(太平道)의 교조 장각(張角)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은 이들 난민들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게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주(幽州) 탁현(𣵠縣)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유비(劉備)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비(張飛)였고, 그 다음에 관우(關羽)를 만났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했다.

 

장비의 요청(要請)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다.[桃園結義]

 

이어서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 후,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劉玄德)은 조조[], 손권[]과 함께 촉()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45. 도청도설(道聽塗說) // 길거리에 펴져 돌아다니는 뜬소문을 이르는 말.

出典論語陽貨篇 / ‘漢書藝文志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論語陽貨篇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道聽而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德之棄也].”

 

길거리에서 들은 말[道聽]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塗說]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고 천도(天道)를 지상(地上)에서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는,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고 인덕(仁德)을 쌓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論語에서 이르고 있다.

 

후한시대, 반고(班固)가 엮은漢書藝文志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道聽塗說]’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소설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 패관(稗官)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유사어구이지학(口耳之學), 가담항설(街談巷說), 유언비어(流言蜚語)


46. 동병상련(同病相憐) //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어려운 사람끼리 동정하고 도움. 出典吳越春秋 闔閭內篇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 ()나라의 공자(公子) ()은 사촌동생인 오왕(吳王) ()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小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闔閭]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이며 초나라를 공략해야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원려(遠廬) 때문이었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유사어동우상구(同憂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 相助), 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47. 득롱망촉(得隴望蜀) //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욕심만 부림을 이르는 .

出典後漢書光武紀 / ‘三國志魏志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隴西:감숙성)에 외효(椳囂), (: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睡陽: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割據)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분자(劉盆子), 유영(劉永), 이헌(李憲), 공손술(公孫述)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그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僣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

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A.D 33), 광무제와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외아들 외구순(椳寇恂)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隴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A.D 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宿願)을 이루었다.

 

동의어평롱망촉(坪隴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유사어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 馬欲率奴)


48. 마이동풍(馬耳東風) // 남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고 지나쳐 흘려 버림을 이름.

出典李太白集券十八

 

이것은 李白<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라는 장편의 가운데 있는 말이다.

 

푸른 산을 둘러싸고 뜬구름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고,

그 하늘 가운데 외로운 달이 흐르고 있다.

외로운 달은 추위에 못 이겨 빛나고,

은하수는 맑고 북두칠성은 흩어져 깔려 있는데,

밤의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난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밤 그늘 서리의 하얀 것을 생각하고,

자네의 집 우물의 구슬 난간에 얼음이 얼어붙은 모양을 생각하고,

얼어붙은 자네의 마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 술이나 마셔 한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거나 부()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 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 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나서 李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 걸세.

동풍(東風)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음이 있네.

 

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


49. 막역지우(莫逆之友) // 아주 허물없는 사이. 出典大宗師篇

 

<莊子>에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자사(子祀)와 자여(子輿)와 자리(子犁)와 자래(子來)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하기

, “누가 능히 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사생존망(死生存亡)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

 

子祀 子輿 子犁 子來 四人相與語曰 孰能以無爲者 以生爲背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서로 도우랴. 능히 하늘에 올라가 안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 다하는 바가 없으랴하고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子桑戶 孟子反 子琴張 三人相與語曰 孰能相與於無相與 相爲於無相爲. 孰能登天遊霧 撓撓無極 相忘以生 無所終窮 三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友.


50. 맥수지탄(麥秀之歎) //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 出典’ / ‘詩經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음락(淫樂)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한 신하 중 삼인(三人)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箕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의 아들 발()에게 주살(誅殺)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은 은왕조(殷王朝)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교활한 저 철부지[紂王]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동의어맥수서유(麥秀黍油), 맥수지시(麥秀之詩)


51. 맹모단기(孟母斷機) //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을 , 짜던 베를 칼로 잘라서 훈계한 고사로 어머니의 엄격한 자 녀 교육을 이름. 出典列女傳 蒙求

 

孟子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거니와, 이보다 앞서 소년시절에 유학에 나가 있던 孟子가 어느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다가 孟子에게 물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냐?”

아직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던 칼로 끊어버렸다. 孟子가 섬찟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君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두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꾼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차라리 그 夫子에게 옷은 해 입힐지라도, 오래도록 양식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여자 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멀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孟子가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서 배움에 힘써, 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드디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이것을 소위 斷機之敎라고 일컫는다.

 

동의어단기지계(斷機之戒), 단기계(斷機戒)

유사어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52. 명경지수(明鏡止水) // 맑은 거울과 조용한 물.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름.

出典莊子德充符篇

 

莊子德充符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라에 왕태라는 올자(兀者)가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孔子의 제자 상계(相季)가 특출한 면도 없는 왕태에게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孔子사람은 흐르는 물로 거울을 삼는 일이 없이 그쳐 있는 물로 거울을 삼는다. 왕태의 마음은 그쳐 있는 물처럼 조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거울삼아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또 같은 德充符篇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이런 말을 들었는가? ‘거울이 밝으면 티끌과 먼지가 앉지 않으며, 티끌과 먼지가 앉으면 밝지 못하다. 오래도록 현자(賢者)와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다.’ 이제 자네가 큰 것을 취하는 것은 선생님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말을 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허물이 아니겠는?”

 

聞之曰 鑑明則塵垢不止 止則不明也 久與賢者處 則無過 今子之所取大者先生也 而猶出言若是 不亦過乎.


53. 명모호치(明眸皓齒) // 눈동자가 맑고 이가 희다는 뜻으로, ‘미인을 형용하는 .

出典杜甫哀江頭

 

안록산(安祿山)이 난리를 일으켜 낙양(洛陽)이 함락된 것이 755, 두보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그해에 두보는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을 처자에게 통고하기 위하여, 당시 소개(疏開)되어 있는 長安 근처의 봉선(奉先)으로 갔다.

도적들의 수중에 있는 長安에서 봄을 맞이한 杜甫는 남몰래 江頭를 찾아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이 江頭를 슬퍼하며, 목소리를 삼키고 울면서 이 <哀江頭>란 시를 지었던 것이다.

 

밝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피로 더러워진 떠도는 혼은 돌아가지를 못하네.

맑은 위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은 깊은데,

나라로 끌려가 사니 피차간 소식이 없네.

인생은 이 있어 눈물이 가슴을 적시니,

강물에는 강꽃이 피니 어찌 마침내 다함이 있으랴.

황혼에 오랑캐 기마들은 티끌로 을 채우는데,

남쪽으로 가고자 하여 북쪽을 바라보네.

 

明眸皓齒今何在 血汗遊魂歸不得

淸渭東流劍閣深 去住彼此無消息

人生有情淚沾臆 江水江花豈終極

黃昏胡騎塵滿城 浴往城南望城北

 

여기에서 明眸皓齒라고 한 것은 楊貴妃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54. 모순(矛盾) //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出典韓非難勢篇

 

어느날 초나라 장사꾼이 저잣거리에 방패[]와 창[]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 여기 이 방패를 보십시오. 이 방패는 어찌나 견고한지 제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한 다음 이번에는 창을 집어들고 외쳐댔다.

,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때, 구경꾼들 속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楚人有鬻楯與矛者 譽之曰 吾楯之堅 莫能陷也 又譽其矛曰 吾矛之利 於物無不陷也 或曰 以子之矛 陷子之楯何如 其人不能應也.

 

유사어자가당착(自家撞着)


55. 무위이화(無爲而化) //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여 잘 이루어.

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나서 잘 감화됨. 出典老子五十七章

 

老子道德經에는,

천하에는 행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진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가난해진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문명의 도구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나라는 혼란해진다. 인간은 지혜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법률이 정밀해지면 해질수록 죄인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말한다.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은 스스로 하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일 없이 있으면 백성은 저절로 잘 살게 되고,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老子는 말한다.

“‘는 언제나 無爲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체를 하고 있다.(道常無爲 而無不爲)”.

 

老子의 말은 계속된다.

후왕(侯王)이 만약 능히 이 를 잘 지키면 만물은 자연히 화()하려 한다.(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56. 문경지교(刎頸之交) // 생사를 같이하는 친한 사귐. 또 그런 벗.

出典史記廉頗 藺相如列傳

 

전국시대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유현(劉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和氏之璧)을 원상(原狀)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 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袒負荊]’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동의어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57. 문일지십(聞一知十) // 한가지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앎. 出典論語公冶長篇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었으며 철인(哲人)으로 꼽힌 사람도 10명이나 되었다.

 

제자 중에 자공(子貢)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주유천하(周遊天下)할 때의 경비 대부분을 대었고 학문의 재주와 재치도 뛰어났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顔回)는 매우 가난했으나 삼 개월 동안 어질었다고 인()을 허여(許與)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안회와 자공의 길고 짧음에 대하여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은 ()가 어찌 감히 회()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했다. 역시 자공은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신을 알고 있었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이는 스승인 공자의 가슴에서 기뻐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58. 문전성시(門前成市) // 권세가나 부자가 되어 집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루다시피 함. 出典漢書孫寶傳 鄭崇傳

 

전한(前漢) , 11대 황제인 애제(哀帝 : B.C 6-7)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저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 정씨(丁氏)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이 간()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 중 상서 복야(尙書僕射)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창은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鄭崇)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옵소서.”

 

애제는 그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 폐하. ‘신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鄭崇)의 소청을 묵살한 채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鄭崇)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尙書令趙昌佞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崇 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下崇獄窮治 死獄中.

 

유사어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문전작라(門前雀羅),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59. 미생지신(尾生之信) // 신의가 굳음. 出典史記 蘇秦列傳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음. 出典莊子 盜跖篇

 

춘추시대, ()나라에 미생(尾生 : 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였다.

 

어느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定時)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溺死)하고 말았다.

 

尾生은 믿음으로써 여자와 더불어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밀려와도 떠나지 않아, 기둥을 끌어안고서 죽었다.”

 

信如尾生 與女子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柱而死.

 

전국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나라 소왕(昭王)을 설파(說破)할 때, <신의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앞에 소개한 미생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같은 전국시대를 살다간 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莊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莊子盜跖篇에서 근엄 그 자체인 孔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盜跖)의 입을 통해서 미생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磔刑)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名目)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동의어포주지신(抱柱之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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