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빠빠라기는 하느님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빠빠라기는 하느님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투이아비 (사모아의 추장)

 

 

빠빠라기는 어떤 특별하고도 또한 극도로 혼란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어찌하면 어떤 것이 자기 소용에 쓰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제 권리가 되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것도 대부분 다만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며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혼자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만약에 한 사나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내 머리통은 내 것으로 나 외에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사실 그건 그렇다. 확실하게 그대로 맞다. 그에 대해서 아무도 시비를 걸어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손의 소유자 이상으로 그 손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달리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라면 빠빠라기는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빠빠라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야자 나무는 내 것이다.” 왜냐하면 야자나무가 그 빠빠라기의 오두막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야자 나무를 자기가 낳기라도 했다는 듯이. 야자나무는 결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야자 나무는 대지에서 우리들을 향해 내민 하나님의 손인 것이다. 하나님은 실로 많은 손을 가지고 계시다. 어떤 나무나 꽃도, 어떤 풀도, 바다도, 하늘도, 하늘의 구름도, 모두가 하나님의 손인 것이다.

 

우리들은 그 손을 쥐고 기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손은 내 손이다.” 그러나 빠빠라기는 그렇다고 우기는 것이다.

 

우리들의 말에 라우라는 것이 있다. “나의라는 의미이며 마찬가지로 너의라는 의미도 있다. 둘은 거의 하나이며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빠빠라기의 말에는 나의너의이상으로 차이가 큰 말은 거의 없다. “나의란 단지 나 혼자, 내 것이다. “너의란 다만 너 혼자, 네 것이다. 그러므로 빠빠라기는 자기 오두막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을 모두가 제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에게도 거기에는 권리가 없다. 그 외에 아무에게도.

 

만약에 네가 빠빠라기에게로 가서 무엇인가 거기 있는 것을 본다고 하면 그것이 과일이건 나무이건 물이건 숲이 건 비록 한 줌의 흙이건 간에 - 늘 그 곁에 누군가가 서서 말해 준다. “이건 내 것이다. 조심해. 내 것에 손을 대지 마라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손에 넣거나 하면 그는 악을 쓰며 너를 도둑놈이라고 지목한다. 이것은 몹시 불명예스러운 말인데 다만 네가 이웃의 내 것에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인 대추장의 부하들이 서둘러 달려와서 너를 쇠고랑으로 묶어 파레 푸이 푸이(형무소)에 넣고 말 것이다. 그리고 너는 한평생 소외된다.

 

어떤 사람이 이것은 내 것이라고 선언한 물건에 다른 사람이 손을 대지 않도록, 이것은 누구의 것,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특별한 법도에 의해서 정확하게 결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유럽에서는 그 누구도 이 법도를 어기지 못하도록 전문으로 감시를 맡아 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 이들은 빠빠라기의 물건이 무엇 하나 빼앗기지 않도록 지킨다. 그것은 빠빠라기가 딴 데서 취해 온 것인데도 말이다.

 

빠빠라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재산을,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인수받기라도 한 양 권리를 마치 제가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우긴다. 야자 나무나 꽃도, 바다나 하늘도, 그리고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도 진짜 제 것인 양 - .

 

빠빠라기가 자기의 많은 내것을 위해 법도를 만들어 감시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내 것을 아주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혹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내 것을 가지고 가거나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면,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또 많이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내 것이 많이 모여드는 마술이나 요술을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 것을 모으는 것은 일종의 특별한 용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들이 명예라고 부르는 것과 꼭이 서로 손을 잡지 않아도 좋다는 용기. 하나님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하나님 것을 뺏아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기는 있다. 이런 사람들은 빠빠라기 중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하나님의 것을 훔친다. 달리 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무엇인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거의 전혀 없는 듯하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는 터요, 또 도무지 마음을 쓰지 않고 있었으니 아무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많은 내 것을 받아서 태어난 사람도 많다. - 어쨌든 하나님은 이미 거의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이 모두 훔쳐가 내 것과 네 것으로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모두의 것으로 정하고 만드신 태양을 신은 이미 모두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가 너나없이 남보다 많은 태양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크고 밝은 양지는 극히 적은 숫자의 사람이 자기만 햇볕을 넉넉히 쬐고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이 음지에서 가련하게도 웅크린 채 가까스로 햇빛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 그 크나큰 자리의 최고의 아리이 시리(지배자)가 아니었고 이미 진짜 기쁨을 잃고 알았다. 빠빠라기는 이렇게 뇌까림으로써 신을 부정한다. “모두가 내 것이다.”

 

그러나 빠빠라기는 여러 가지 것을 잔뜩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원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소행이 훌륭하고 옳다고만 단언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훌륭하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니다.

 

만일 빠빠라기가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 자신도 알 터이다. 확실하게 가질 수 없는 것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란 것을. 그리고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것 따위는 원래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크나큰 자리를 만드신 것은 모두가 그곳에 기쁨의 땅을 갖기 위한 것이었다. 빠빠라기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크나큰 자리는 충분히 넓고 누구나가 햇빛과 조그만 기쁨이 있으며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나 조그만 야자 나무 숲과 발을 딛고 설 토지가 분명히 있을 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정하신 바이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그 아이의 하나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실지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준비해 둔 바 있는 조그만 장소를 찾아 헤매고 있는가.

 

빠빠라기가 하나님의 분부를 듣지 아니하고 자기네의 법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빠빠라기의 재산에 적을 파견하셨다. 빠빠라기의 내 것을 쳐부수기 위해서 습기와 열을 파견하셨다. 빠빠라기의 것은 이윽고 낡은 것이 괴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간다. 하나님은 그들의 재산을 멸하기 위해서 불에 큰 힘을 주었다. 그리고 폭풍우에게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엄중한 단죄라면 빠빠라기의 마음 속에 공포를 심어 놓은 것이다. 훔쳐 온 것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빠빠라기는 결코 깊은 잠을 이룬 적이 없다. 낮 동안에 모아온 것을 밤중에 빼앗기지 않도록 잠에서 노상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자기의 내 것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내 것은 빠빠라기를 괴롭힐 것이며 이렇게 비웃을 것이다.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훔쳐 왔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괴롭혀 못 살게 굴고자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포보다도 훨씬 고약한 벌을 빠빠라기에게 주었다. 하나님은 빠빠라기 중에서 내 것을 아주 조금, 혹은 전혀 갖지 않은 사람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전쟁을 주었다. 이 싸움은 치열하며 고되고 밤도 없고 낮도 없다. 이 싸움은 만인을 괴롭힌다. 만인의 살아 있는 기쁨을 짓이긴다.

 

가진 자는 베풀지 않으면 안될 터인데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갖지 않은 자가 신의 전사인 적도 좀체 없다. 그들은 단지 약간 늦게 나타나 약탈하는 데 지각을 했을 뿐이거나, 아니면 약간 운수가 나빴거나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거의 모두 약탈을 당하시고 빈털터리가 되신 것을 이치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신의 손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되돌려 주자고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오 형제들이여. 이런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모아의 한 마을의 온 주민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큰 오두막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그네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빌려 주지 않은 사람을. 이런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손에 바나나를 송이째 들고 있으면서 바로 앞에 굶주린 사나이가 동정을 구해도 단 한 개를 나누어 주지 않은 사람을.

 

나는 너희들 눈에 불꽃이 튀고 입술에 경멸의 빛이 감도는 것이 잘 보인다. 그렇다. 이것이 빠빠라기가 늘상 보여 준 수작이었다. 비록 백 장의 거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에게 한 장도 내주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 자가 거적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비난하거나 거적이 없는 것을 갖지 못한 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비록 오두막의 천장 꼭대기 제일 높은 데까지 넘치는 음식이 있고 그와 아이가(가족)1년 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큼 쌓여 있어도 먹을 것이 없고 허기에 지친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더구나 많은 빠빠라기가 굶어 여윈 채 거기 서 있다는데.

 

무르익은 야자 나무는 자연스럽게 잎을 떨어뜨리며 열매도 떨어뜨리는 법이다. 빠빠라기는 잎이나 열매가 떨어질세라 안달하는 야자 나무처럼 살고 있다. “이건 내 것이야! 손대지 말라니까! 먹지 말아.” - 어떻게 하면 야자 나무는 새로이 열매를 맺을까. 야자 나무는 빠빠라기보다 훨씬 영리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많은 거적이며 돼지를 가지고 있는 추장에게 우리들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의는 추장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며 거적이나 돼지를 존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기쁨을 보여 주고 추장의 용기와 슬기를 칭송하기 위해 우리들이 아로파(선물)로서 그에게 보냈을 따름이다.

하지만 빠빠라기는 글 형제의 거적이나 돼지 수를 칭송한다. 용기나 슬기에는 아랑곳 없는 것이다. 거적이나 돼지를 갖지 않은 자는 아주 조금밖에, 혹은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한다.

 

거적이나 돼지는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굶주린 사람들을 찾아 걸어갈 수도 없는 것이며 빠빠라기 또한 그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빠빠라기가 존경하고 있는 것은 그 형제들이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거적이나 돼지의 수량이었으므로 도저히 그것들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빠빠라기가 그 형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리고 만약에 빠빠라기가 그 형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리고 내 것”, “네 것으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형제들에게 제 거적과 돼지를 운반하여 모두가 자기네의 큰 내 것을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형제들을 컴컴한 밤의 어둠 속으로 내몰아 버리는 대신에 제 거적을 나누어 주리라.

 

그러나 빠빠라기도 잘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야자 나무나 바나나나 맛있는 타로 토란, 숲 속의 모든 새, 그리고 바다의 온갖 생선을 베푸신 뜻을 모른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이뻐하며 행복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결코 우리들의 몇 안되는 인간만을 행복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난으로 괴롭히고 없는 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에게서 많은 물건을 받았으면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물건은 손아귀에서 부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뻗쳐 있으며, 누군가 혼자서 다른 사람과는 균형이 잡히지 않게 많은 물건을 갖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서 누군가가 혼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나는 양지에 있다. 너는 음지로 가라.”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가 양지로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손 안에서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이상 싸움도 없고 고통도 없다. 교활한 빠빠라기는 이렇게 우리들을 속이려 든다. “하나님의 것이 어디 있어. 네가 손아귀에 넣은 물건은 네 것이다.” - 이와 같은 어리석은 말에 귀를 내주지 말라. 바른 슬기에 귀를 기울이자.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 우리들의 소유 개념에 대한 투이아비의 경멸적인 언사는 사모아의 원주민이 완전한 공유재산제 아래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라면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고장에서는 사실 우리들이 쓰는 의미에서의 나의”, “너의라는 개념이 없다. 내가 그 섬을 여행할 때 어떤 곳에서도 그곳 원주민은 당연한 일로서 내게 잠자리와 거적과 식사, 그리고 모든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추장은 나와의 첫대면에서 이렇게 인사한 적이 있다. “내 것은 당신 것이오. 훔친다는 개념은 섬사람들과는 인연이 없소.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