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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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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읽기길잡이

 

아래의 제시문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1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2일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의 전반부이다.

 

무엇을 살까? 무엇을 가질까? 누구를 차지할까? - 우리는 이러한 욕구에 치우쳐서 살기 쉽다. 그리하여 욕구의 노예가 되고 소유를 곧 삶의 성취요 가치라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망치고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산업 사회는 이런 사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달리, 내가 누구냐? 무엇이 바른 삶이냐?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냐? - 등의 물음에 의지해서 자신의 인생의 지표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살기는 오늘날 쉬울 것 같지 않다.

 

가령 입학 시험만 해도, 앞쪽의 물음들에 맞추어 대비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뒤쪽의 물음들에 맞추어 그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학생도 있겠는데, 두 쪽 학생 사이의 논란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 글은 그러한 논란에 좋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얻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만 온 힘을 기울인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삶의 존재 양식(being mode of existence)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보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 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 방식으로 여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 양식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소유는 가능한 하나의 지향(志向)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특히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두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두 개념 가운데 어느 쪽도 추상적으로, 순전히 사색의 문제로만 검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검토될 수도 없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일상 생활에 반영되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소유와 존재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는, 독자들이 이 두 가지 양자 택일적인 생존 양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학 습

삶의 소유 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강의 내용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이고 그 내용을 모두 노트에 적어 외움으로써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 체계(system of thought)의 일부가 되지 못하여, 그들의 사고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강의의 내용을 사상 또는 전체적인 이론의 고정된 몇 가지 집합으로 변모시켜 저장한다. 학생들과 강의 내용은 서로 관계 없이 동떨어져 있으며, 다만 학생 각자가 어떤 다른 사람의 진술 - 그 사람이 창조했거나 다른 전거(典據)에서 옮겨 온 진술의 집적(集積)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 뿐이다.

 

소유 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 ‘배운 것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렇게하기 위해 그들은 배운 것을 잘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간직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소유형의 사람은 어떤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면 좀 당황한다. 왜냐 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양의 지식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요 형태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쉽게 고정시킬 수 없는 관념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세계에 대해존재 양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학습의 과정은 전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연속되는 강의에, 그것이 첫 강의라 해도 백지 상태로 출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 강의가 다룰 문제를 미리 생각하고 있어서,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들 나름의 어떤 의문과 문제가 있다. 그들은 강의의 제목에 대해 충분히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말과 개념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되는 대신에, 귀를 기울여 듣는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그들이 듣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사고 과정을 자극한다. 새로운 의문, 새로운 전망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생긴다. 그들의 학습 과정은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교수의 말을 듣고, 들은 것에 반응하며, 자발적으로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단순히 집으로 가져가서 암기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지는 않는다.

 

학생 개개인은 강의를 통해 영향을 받고 변화한다. 그들은, 강의를 받은 뒤에는 강의를 받기 전과는 달라진다. 물론, 이러한 학습은 강의가 자극적인 내용을 제공할 때에만 가능하다. 존재 양식에서는 공허한 이야기는 아무런 반응도 얻을 수 없으며, 그러한 경우 존재 양식을 가진 학생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 자신의 사고 과정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 현재의 어법(語法)에서는 모호해지고 낡은 표현이 되어 버린 하나의 단어 ‘interests(흥미, 관심)’에 관해 잠시 참고로 살펴보자.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inter - ess’ ‘- 속에, 또는 가운데 있다.’는 뜻으로서, 라틴어에서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능동적인 관심(interests), 중세 영어에서는 ‘to list’(형용사는 listy, 부사는 listly)라는 단어를 사용되었다. 그런데 현대 영어에 와서는 ‘to list’‘a ship lists(배가 올라온다)’와 같이 오직 공간적인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으며, 정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의미는 오직 부정적인 ‘listless(무관심한)’라는 어법에만 남아 있다. ‘to list’는 전에는 ‘ -을 능동적으로 추구하다또는 ‘ -에 성실하게 관심을 갖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어(to list)의 어원은 ‘lust(욕망)’와 같지만, ‘to list’는 우리가 추구하는욕망이 아니라 자유롭고 적극적인 관심 또는 노력이다. ‘to list’는 성명 미상의 저자(14세기 중반)가 저술한 미지의 구름에서 사용한 중요한 표현의 하나이다. 영어가 이 말의 부정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14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일어난 정신의 변화를 특징짓는 것이다.

 

 

기 억

기억은 소유 양식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존재 양식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기억 형태의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루어지는 결합이 어떤 종류인가 하는 것이다.

 

소유 양식의 기억에 있어서는, 한 단어와 다음 단어의 결합이 그 결합이 이루어지는 빈도에 의해 확고하게 성립되는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결합은 완전히 기계적이다. 아니면, 서로 상반되는 결합 또는 어떤 한 점에 집중하는 개념의 결합, 또는 시간· 공간· 크기· 색채의 결합, 또는 주어진 사상 체계 안에서의 결합과 같이 그 결합은 순전히 논리적일 수도 있다.

 

존재 양식에 있어서 기억은 말· 개념· 광경· 회화· 음악 등을 능동적으로상기시킨다. , 기억해야 할 하나의 자료와 그것이 관계되는 다른 많은 자료를 연결시킨다. 존재 양식의 경우에 있어서의 결합은,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도 아닌, 살아 있는 결합이다. 하나의 개념은 올바른 단어를 찾을 때 동원되는 생산적 사고(또는 감각)의 행위에 의해 다른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내가 두통이라는 단어와 고통또는 아스피린이라는 단어를 연관시킨다면, 나는 논리적이고 극히 평범한 연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통이라는 단어와 스트레스도는 분노라는 단어를 연관시킨다면, 나는 주어진 자료를 거기에서 생길 수 있는 결과와 연관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그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얻은 통찰인 것이다. 이 후자의 기억형(記憶型)은 그 자체가 생산적인 사고 행위를 이룬다. 이러한 종류의 살아 있는 기억의 가장 뚜렷한 예는 프로이트가 생각해 낸 자유연상이다.

 

자료를 축적하는 습관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기억력이 효율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강력하고 즉각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외국어 단어일지라도 꼭 기억해 낼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마침내 기억해 낸다. 그리고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는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내가 그 사람과 다시 얼굴을 맞대고 그의 모든 인격적 특징에 관해 생각을 집중시키면, 2주일 전이든 5년 전이든 과거에 내가 분석한 그 사람의 꿈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5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꿈을 전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존재 양식에 있어서 기억은, 전에 보았거나 들은 어떤 것을 되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찍이 보았던 사람의 얼굴이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려고 노력함으로써 이러한 생산적인 기억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금방 기억해 낼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주제를 다시 창조하여 그것을 머릿속에 소생시켜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억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 얼굴이나 풍경을 완전하게 생각해 내려면, 충분히 집중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기억이 완전히 떠오를 때, 마치 그 사람이나 풍경이 자기 앞에 실제로 물리적으로 있는 것처럼, 그 얼굴이 생각난 사람은 살아 있는 것 같고, 또 기억된 풍경은 선명해진다.

 

소유 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인물이나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진을 바라보는 방식과 같다. 사진은 어떤 사람이나 풍경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기억에 대한 보조물로서만 도움이 되는데, 그것이 자아내는 일반적인 반응은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 맞아요. 나는 그 곳에 있었어요.’라는 것이다. 사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소외된기억이 되고 있다.

 

종이에 맡겨 놓은 기억은 한 다른 행태의 소외된 기억이다. 기억하고 싶은 적어 놓음으로써 그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머리에 새겨 놓으려 하지 않는다. 노트를 잃어버림으로써 정보에 대한 기억도 함께 잃어버리는 경우를 빼고는, 그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기억의 은행이 노트의 형태로 나의 구체화된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기억 능력은 떠나 버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많은 자료를 고려한다면, 노트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저장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기어가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적어 놓는 행위가 우리의 기억력을 감퇴시킨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전형적인 몇 가지 예는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흔한 예는 상점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점원들은 두세 품목 값의 간단한 덧셈조차 거의 하지 않고 바로 기계를 사용한다.

 

학교의 수업 시간은 또 다른 예를 보여 준다. 교사들의 관찰에 의하면, 강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받아 적는 학생은, 자신의 이해력을 믿고 최소한의 요점만 기억하는 학생보다 십중팔구 이해력이나 기억력이 뒤떨어진다.

그리고 또 음악가들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악보 없이 그 음악을 연주하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기억력이 비상하다고 알려진 토스카니니는 존재 양식을 가진 음악가의 좋은 예이다.)

마지막 예로서, 문맹자나 글을 겨우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산업화된 국가의 잘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나는 멕시코에서 관찰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은, 읽고 쓰는 능력이란 결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읽고 쓰는 것을 단순히 자신의 경험 능력과 상상력을 약화시키는 자료를 읽는 데에만 사용할 경우 특히 그렇다.

 

 

대 화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의 차이는 두 가지 대화의 경우에서 쉽게 관찰될 수 있다. X라는 의견을 가지고있는 AY라는 의견을 가지고있는 B, 두 사람의 전형적인 대담식 논쟁을 예로 들어 보자.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의견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이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견해를 지키기 위해 더 좋은, 즉 더 합리적인 논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 자기 자신의 견해가 달라지거나 상대방의 견해가 달라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 견해가 자기의 소유물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잃는 것은 자신의 빈곤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의 견해가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논쟁이 아닌 대화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유명하고 덕망이 있고 우수한 자질까지 갖춘 사람과, 아니면 무언가 얻고 싶은, 즉 직장을 부탁하거나 사랑을 받고 싶거나 칭찬을 기대하거나 하는 사람과 만난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약간 불안을 느끼게 되어, 흔히 그 중요한 회견을 위해 준비를 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관심을 끄는 화제를 생각하고, 대화를 어떻게 시작할까 하는 것까지 미리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역할에 관한 한 전체 대화의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다. ,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있는 것, 즉 자기의 과거의 성공, 자기의 매력적인 개성(또는 그 역할이 더 효과적일 경우는 상대방을 위협하는 개성), 자기의 사회적 지위, 교제 범위, 외모와 복장 등에 관해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단히 무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하며,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하여 그 다음 대화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전시한다. 이러한 것을 썩 잘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연출된 인상은, 그 사람의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의 판단력의 빈곤에 기인한다. 만일 그 연기자가 별로 영리한 사람이 아닐 경우, 그 연기는 어색해서 꾸며 낸 듯하고 지루하여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무장하지 않은 채 상황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발적,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지위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아(自我)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상대방 사람과 상대방 사람의 생각에 충실히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리하여 생산적일 수 있고 줄 수 있기 대문에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낸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자기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반응할 용기만 가지면 새로운 어떤 것이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한 집착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서, 대화할 때에 아주 활기를 띤다. 그러한 활기는 전염성이 있어서, 가끔 상대방이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대화는 상품(정보· 지식· 지위)의 교환에만 그치지 않고, 누가 정당한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대결자들은 함께 춤추기 시작하며, 승리감이나 슬픔 - 양쪽 다 무익하다 -을 안고 헤어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헤어진다.(정신 분석 요법의 본질적인 요소를, 치료하는 의사가 이러한 활기를 환자와의 관계에서 만드는 것이다. 치료의 분위기가 답답하고 활기가 없고 지루하다면, 아무리 정신 분석학적으로 해석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독 서

대화에 있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독서에 있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이며, 그러한 대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서에 있어서는(직접적인 대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책을 읽는가(또는 누구와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이 없는 값싼 소설을 읽는 것은 헛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적인 반응을 가져올 수 없다. , 문장은 텔레비전의 쇼처럼, 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적우적 먹는 감자튀김처럼 삼켜질 뿐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발자크의 소설은, 내적 참여와 함께 생산적으로, 다시 말해 존재 양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 소비의 양식, 즉 소유 양식으로 읽는 일로 허송되고 있다. 독자들은 호기심에만 의지하여 주인공이 죽는가 사는가, 여주인공이 유혹당하는가 저항하는가 등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이며, 또 그 결과를 알고 싶어한다. 또 그 결과를 알고 싶어한다. 소설은 그들을 흥분시키는 일종의 전희(前戱) 역할을 한다. , 행복하거나 불행한 결말을 통해 그들의 경험은 절정에 이른다. 그들이 결말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의 경험에서 그 결말을 찾아낸 것처럼 현실적으로 전체의 스토리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늘리지는 못한다. , 그들은 소설 속의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더 깊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식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독서 양식은 철학책이나 역사책인 경우에도 똑같다. 우리가 철학책이나 역사책을 읽는 방식은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니, 변형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의 문화적 재산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학교 교육이 끝날 때 학생들이 적어도 그 최소량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 학생들은 저자의 주요 사상을 욀 수 있도록 독서 교육을 받는다. 이리하여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을 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 여러 교육 수준의 차이는 주로 획득한 문화적 재산의 양에 있으며, 그 양은 학생들이 그 후의 생애에서 소유하고자 하는 물질적 재산의 양과 대게 일치한다. 이른바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욀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박물관 안내인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러한 특정 지식 이상은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철학자들과 말하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철학자들이 어떤 문제는 무시하고 쟁점을 회피하는지 알아채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또 그들은, 저자가 그 시대에는 새로웠던 것과 그 시대의 상식이었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구별하는 방법도 배우지 않는. 그리고 그들은, 저자가 머리로만 말할 때와 머리와 가슴으로 함께 말할 때를 구별할 수 있도록 듣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저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 내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 양식을 가진 독자는 이따금, 높은 평가를 받는 책조차도 전혀 가치가 없거나 극히 제한된 가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저자 자신이 중요하다고 쓴 모든 사실에 관해 저자보다 때로는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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