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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사성어 - 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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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인박명(佳人薄命) //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기박함. 出典蘇軾


 

 

아래 시의 작자 소식(蘇軾:1036-1101)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시로 쓴 데서 전하여졌음.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雙頰凝酥髮抹漆 眼光入廉珠的白樂

故將白練作仙衣 不許紅膏汗天質

吳音嬌軟帶兒癡 無限間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 閉門春盡楊花落

 

이 시는 1086년부터 8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은 어린 승려를 노래한 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2. 각주구검(刻舟求劍) //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 고집하며 이를 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유하는 말. 出典呂氏春秋

 

戰國時代, 나라의 한 젊은이가 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楚人 有涉江者 其劍 自舟中 墜於水 遽刻其舟 曰是 吾劍之所從墜舟止 從其所刻者 入水求之 舟己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己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免)


 

3. 간담상조(肝膽相照) //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진심으로 사귐. 出典韓愈柳子厚墓誌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당대(唐代)의 두 명문(名文) 대가에 한유(韓愈 : 退之’)와 유종원(柳宗元 : 子厚’)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古文復興)운동을 제창한 문우(文友)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때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墓誌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 둣하지만 일단 털끝만큼이라도 이해 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유사어피간담(披肝膽)


 

4. 거안제미(擧案齊眉) // 밥상을 눈썹과 가지런하도록 공손히 들어 남편 앞에 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깎듯이 공경함을 이름. 出典後漢書逸民傳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생활을 하자 양홍도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 속에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

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皐白通)이 양홍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도와서 양홍은 그 후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梁鴻字伯鷰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日

欲得賢如梁伯鷰者鴻聞而聘之 字之日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春 每歸 妻爲具食不敢於鴻

前仰視 擧案齊眉.


 

5. 건곤일척(坤一擲) //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 걸이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

出典韓愈過鴻溝

 

이 말은, 당나라의 大文章家인 한유가 河南省 內鴻溝를 지나다가 그 옛날(B.C 203),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乾坤一擲을 촉구한 張良 · 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 <과홍구(過鴻溝)>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용은 지치고, 호랑이는 피곤하여 이 강을 가르니,

억만 창생들은 성명(性命)이 있다.

누가 군왕을 권하여 말머리를 돌릴 수 있을까?

진정 한 번 던짐을 이루어 건곤(乾坤)을 건다. <과홍구(過鴻溝)> 에서

龍疲虎困割川原, 億萬蒼生性命存. 誰勸君王回馬首, 眞成一擲賭乾坤.

 

항우가 ··땅을 전전하면서 전영(田榮진여(陳餘팽월(彭越) 등의 반군을 치는 사이에 유방은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이듬해 의제 弑害에 대한 징벌을 구실로 56만 대군을 휘몰아 팽성(彭城)을 공략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항우가 반격하자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까지 적()의 수중에 남겨둔 채 겨우 목숨만 살아 하남성 의 형양(滎陽)으로 패주했다.

 

그후 병력을 보충한 유방은 항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싸움을 멈췄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이어 유방도 철군하려 하자 참모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유방에게 진언했다.

 

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사오나, 나라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 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나라를 멸하려는 천의(天意)이오니 당장 쳐부숴야 하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꼴’[養虎遺患]이 될 것이옵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힌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하였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韓信팽월 등의 군사와 더불어 安徽城 내의 垓下에서 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四面楚歌작전을 폈다. 참패한 항우는 안휘성 내의 烏江으로 패주하여 자결하고,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6.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함.

出典大學八條目

 

四書의 하나인大學은 유교의 교의(敎義)를 간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으로서 그 내용은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으로 요약된다.

 

팔조목(八條目) 중 여섯 조목에 대해서는大學에 해설이 나와 있으나 격물치지의 두 조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없다. 그래서 宋代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나와 유교 사상의 근본 문제 중의 하나로 논쟁의 표적이 되어 왔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나라 주자(朱子 : 朱憙, 1130-1200)의 설과 나라 왕양명(王陽明 : 王守仁, 1472-1528)의 설을 들 수 있다.

 

朱子: 萬物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에 이르기까지 각각 ()’

를 갖추고 있다. ‘()’를 하나하나 궁구(窮究)해 나가면 어느 땐가는 활연(豁然)히 만물의 겉과 속, 그리고 세밀함()과 거침()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왕양명(王陽明): 격물(格物)이란 사()이다. ‘란 어버이를 섬긴다든가 임금을 섬긴다든가 하는 마음의 움직임, 곧 뜻이 있는 곳을 말한다. ‘라고 한 이상에는 거기에 마음이 있고, 마음 밖에는 도 없고 도 없다. 그러므로 격물의 이란 바로 잡는다라고 읽어야 하며 를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格物이다. 악을 떠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은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양지(良知)를 명확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지()를 이루는() 것이며, ‘致知이다.


 

7. 초보은(結草報恩) //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出典春秋左氏傳

 

춘추시대 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改嫁시키도록 하여라.”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殉死)케 해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改嫁시켜 드렸다.

 

그 후 진환공(秦桓公)나라를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魏顆)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大力士 두회(杜回)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위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두회의 발 앞의 풀을 엮어(結草) 그가 넘어지게 하여 위과(魏顆)가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改嫁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오.”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壬午 晉候治兵于稷 以略秋士 立黎侯而還 及洛魏顆敗 秦師于輔氏 獲杜回 秦之力人也 初魏武子有擘妾無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病則曰 必以爲殉及卒 顆嫁之曰 疾病則亂 吾從其治也 及輔氏之役 顆見老人結草 以亢杜回 杜回足質而顚 故獲之 夜夢之曰 余而所嫁婦人之父也 爾用先人之治命 余是以報.


 

8. 경국지색(傾國之色) // 나라 안에 으뜸가는 미인. 임금이 혹하여 나라가 뒤집 혀도 모를 만한 미인. 出典漢書李夫人傳

 

傾國傾城과 아울러 美人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연년(李延年)의 다음과 같은 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끊고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李夫人)이다. 傾國이란 말은 李白名花傾國兩相歡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한왕은 색()을 중히 여겨 傾國을 생각한다.라는 구절과 항우에게서 자기 妻子를 변설로써 찾아준 후공(侯公)漢高祖이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 나라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고 칭찬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9. 계륵(鷄肋) // 무엇을 취해 봐야 이렇다 할 이익은 없어도 버리기는 아까움의 비유. 出典後漢書楊修傳

 

삼국 정립 시대가 나타나기 1년 전, 유비(劉備)가 익주(益州)를 점령하고 한중(漢中)을 평정한 다음 위()나라 조조(曹操)의 군대를 맞아 한중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유비의 兵站은 제갈량(諸葛亮)의 용의주도한  확보로 넉넉한데 반하여 조조는 兵站을 소홀히 하여 내부의 질서가 문란하고 거기에다 탈영병이 속출하여 공격도, 수비도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막료 한 사람이 현황을 보고하고 후퇴 여부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던 조조는 닭갈비[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 막료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주부(主簿)인 양수(楊修)가 듣고 長安으로 귀환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참모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漢中)을 여기에 비유한 것은 승상께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겠소?(修獨曰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라고 답했다.

 

과연 양수의 예상대로 조조는 그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조조는 이익이 없다고 하여 한중에서 후퇴하고, 그곳을 확보한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위()나라는 촉한(蜀漢)과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後漢書楊修傳에 실려 있으며, 오늘날 <닭의 갈비[鷄肋]>는 그다지 쓸모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는 비유로 쓰여지고 있다.


10. 계명구도(鷄鳴狗盜) // 행세하는 사람이 배워서는 아니 될, 천한 기능을 가진 사람. 出典史記孟嘗君列傳

 

전국시대 중엽, 나라 孟嘗君은 왕족으로 재상을 지낸 정곽군(靖郭君)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靖郭君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렸다.

 

이 무렵(B.C 298), 맹상군은 대국(大國)나라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3,000명의 식객(食客)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비싼 호백구(狐白裘)를 예물로 진상했다. 그러나 소양왕이 정작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의 총희(寵姬)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맹상군을 수행한 식객 중 도둑질에 능한 특기를 가진 구도란 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날 밤 궁중으로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 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涵谷關)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병을 급파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동행한 식객 중에 소리 흉내내기에 특기가 있는 계명이 인가(人家) 쪽으로 사라지자 이내 첫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 문을 나와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고 한다.


 

11. 고복격양(鼓腹擊壤) // ‘태평성세를 즐김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

出典十八史略樂府詩集 擊壤歌

 

먼 옛날 중국에 성천자(聖天子)로 이름난 요()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복(微服)을 하고 민정(民情)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立我烝民]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莫匪爾極]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不識不知]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順帝之則]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鼓腹]’, 발로 땅을 구르며[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 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日出而作 日入而息]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耕田而食 鑿井而飮]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요. [帝力何有于我哉]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 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요 임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동의어격양지가(擊壤之歌), 격양가(擊壤歌)


 

12. 고성낙일(孤城落日) // 남의 도움이 없는 몹시 외로운 정상의 비유.

出典나라 王維

 

는 왕유(王維:699-759)의 칠언절구(七言絶句)<送韋評事-위평사를 보냄>에서 읊은 것이다.

 

장군을 따라서 우현(右賢)을 취하고자 하니,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居延)으로 향하네.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蕭關) 밖에 옴을 아니,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孤城落日)의 가여.

 

欲逐將軍取右賢 沙場走馬向居延

遙知漢使蕭關外 愁見孤城落日邊

 

에서는 직접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음이 안 놓이는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孤城落日이 불려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요새(要塞)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그곳에서 겪을 안타까운 처지를 상상하여, 그 처지를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

 

요새(要塞) 밖에서의 안타까움을 孤城落日이라는 사물에 집약시킨 왕유(王維)의 필치도 멋지지만, 이것을 홀로 쓸쓸하게 완전히 썩어버릴 일에 마음이 안 놓이는 것에다 연관지어 사용하는 후세 사람들의 말[] 부리는 법도 또한 묘미가 있다.


 

13. 고침안면(高枕安眠) // 근심없이 안심하고 잘 잠. 出典戰國策 魏策 / ‘史記張儀列傳

 

전국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횡(連橫)을 주장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 문왕(惠文王) 10(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 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哀王)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퇴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나라 난왕(赧王) 4(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14. 곡학아세(曲學阿世) //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

出典史記儒林傳

 

()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유사어어용학자(御用學者)


 

15. 공중누각(空中樓閣) // 공중에 누각을 짓는 것처럼 근거나 토대가 없는 사물 을 이르는 말. 出典夢溪筆談

 

송나라의 학자 심괄(沈括:-夢溪翁)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

 

(城市樓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遙見空際有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

 

훗날 청()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의 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空中樓閣)’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

 

이처럼 空中樓閣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海市라는 것은 신기루(蜃氣樓)’를 가리키는 말이다.

 

史記천관서(天官書)’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기(蜃氣)는 누대(樓臺)를 본뜬다. 넓은 들판의 기운이 궁궐을 이룬다.

蜃氣象樓臺 廣野氣成宮闕.

 

 

유사어과대망상(誇大妄想)


 

16. 과혁지시(裹革之尸) //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 出典後漢書援傳

 

마원(馬援)은 후한 광무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지금의 월남인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돌아온, 용맹과 인격이 뛰어난 맹장으로 다시 계속해서 남부지방 일대를 평정하고 수도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환영인파 속에는 지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맹익(孟翼)도 있었는데 그도 판에 박은 듯한 인사말을 하자 마원은,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인가. 옛날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이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일곱 군()을 새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의 작은 봉토를 받았다.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작은 공에 비해 상이 너무 크네.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자 마원은,

지금 흉노와 오환(烏桓)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裹尸還葬耳)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그가 자청하여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자 광무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마원을 다같이 환송토록 명했다고 한다.


17. 관포지교(管鮑之交) //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교라는 뜻 으로, 친구 사이의 다정한 교제를 일컬음. 出典史記列子

 

 

춘추시대 초엽, ()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 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 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

 

유사어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 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시도지교(市道之交)


 

18. 괄목상대(刮目相對) // 괄목하고 대면함. 남의 학식이 부쩍 는 것을 일컬음.

出典三國志吳志 呂蒙傳注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 : 182-252)의 신하 장수 중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戰功)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사 노숙(魯肅)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非復吳下阿夢)’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19. 광풍제월(光風霽月) //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

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 出典宋書周敦頤傳

 

유교(儒敎)는 북송(北宋) 중기에 주돈이(周敦頤 : 1017-1073)가 나와서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中庸·論語·孟子)를 정하여 성도(聖道)를 밝히었으며, 주자(朱子)가 이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宋學)을 대성(大成)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愛蓮說)> 한 편은 글 안에 도학(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앞에서 말한 뜻이거니와,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20. 교언영색(巧言令色) //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 出典論語學而篇

 

공자(孔子 : 이름은 ’, B.C 551-479)는 아첨꾼에 대해論語학이편(學而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에는 ()’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자로편(子路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에 가깝다.(剛毅木訥 近仁)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옹야편(擁也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文質彬彬 然後君子)

 

, (:형식)과 질(: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자라는 뜻이다.

 

반의어강의목눌(剛毅木訥), 성심성의(誠心誠意)

참 조눌언민행(訥言敏行)


 

21. 교주교슬(膠柱鼓瑟) // 고지식하여 조금도 변통성이 없음의 비유.

出典史記廉頗 藺相如列傳

 

조나라에 조사(趙奢)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괄()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趙奢),

 

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이므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

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流言蜚語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膠柱]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大軍)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 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 수 없게 되어 소리[]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22. 교칠지심(膠漆之心) // 아교[]와 옻칠[]처럼 끈끈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교분(交分)을 이르는 말. 出典元微之 白氏文集

 

나라때 백낙천(白樂天)과 원미지(元微之)는 교서랑(校書郞)시절의 동료요, 천자(天子)가 친재(親裁)하여 등용하는 과거에 함께 급제했고, 의 혁신에도 뜻을 같이 해서 나라 시대의 민요를 토대로, 시대의 폐단인 백성들의 분노와 고통과 번뇌를 담은 악부(樂府)에 유교적인 민본사상을 맥박치게 하는 신악부(新樂府)를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두 사람 다 시골로 좌천되었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되니 그리워서 백낙천이 원미지에게 편지를 썼다.

 

“410일 밤에 낙천은 아뢴다.

미지여, 미지여,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이미 3년이 지났네. 그대의 편지를 받지 못한 지도 2년이 되려고 하네. 인생이란 길지 않은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니 말일세. 하물며 아교와 옻칠 같은 마음(況以膠漆之心)으로써 북쪽 오랑캐 땅에 몸을 두고 있으니 말일세. 나아가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물러

서도 서로 잊을 수 없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어, 각자 흰머리가 되려고 하네. 미지여, 미지여,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실로 하늘이 하신 것이라면, 이것을 어찌하랴!“

 

四月 十日夜 樂天白

微之 微之 不見足下面 已三年矣 不得足下書 欲二年矣 人生幾何 離闊如此 況以膠漆之心 置於胡越之身 進不得相合 退不得相忘 牽奱乖隔 各欲白首 微之 微之 如何 如何 天實爲之 謂之奈何.


23. 구밀복검(口蜜腹劍) // 말로는 친한 체하나 속으로 해칠 생각을 가짐. 出典新唐書

 

장량과 제갈량, 강태공 등이 좋은 방면의 모사(謀士)였다면, 당 현종(唐玄宗)때 재상을 19년 지낸 이임보(李林甫)는 나쁜 방면으로 그들과 맞먹는 모사였다. 간사하기로는 조조와 필적할 인물이나 조조는 대인(大人)에 속하지만 임보는 소인(小人) 가운데 소인(小人)이었다.

당나라를 뒤엎을 만한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도 이임보가 두려워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반란을 일으킬 만큼 그를 두려워했다.십팔사략(十八史略)에 기록된 이임보의 평()을 보자.

이임보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성격이 음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口蜜腹劍]’라고 말했다. 서재에 앉아 깊이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다음은 반드시 주살(誅殺)이 있었으며 가끔 큰 옥사를 일으켰다. 태자로부터 이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재상 지위에 있던 19년 동안에 천하의 난리를 길러내었으나, 현종(玄宗)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안록산도 이임보의 술수를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李林甫 妬賢嫉能 排抑勝己 性陰險 人以爲 口有蜜腹有劍每夜獨坐偃月堂 有所深思 明日必有誅殺 屢起大獄 自太子以下皆畏之 在相位十九年 養成天下之亂 而上不悟 然綠山畏林甫術數 故終其世末 敢反.

 

유사어소리장도(笑裏藏刀), 소중유검(笑中有劍)


 

24. 구우일모(九牛一毛) // 많은 가운데서 가장 적은 것의 비유. 出典漢書報任安

 

()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 B.C ?-72)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初戰)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厚待)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 : 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옵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사마천은 이를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 적고, 이어 착찹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 녕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유사어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대해일적(大海一滴)


 

25. 군계일학(群鷄一鶴) // 평범한 사람 가운데의 뛰어난 사람을 이름. 出典晉書嵆紹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의 혜강(嵆康)의 아들로 혜소(嵆紹)가 있었는데 10살 때 아 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에게 상주(常住)하였다.

서경(書經)에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혜강은 도륙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뛰어납니다. 그에게 비서랑(秘書郞) 벼슬을 시켜 주십시오.”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嵆紹)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것은 자네가 그의 부친을 애초부터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네.”

 

동의어계군일학(鷄群一鶴)

 

 

 

 

26. 권선징악(勸善懲惡) //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出典春秋左氏傳

 

()나라 성공(成公) 149월에 제()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가 있던 교여(僑如 : 宣伯)가 부인 강씨(姜氏)를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교여라고 높여서 부른 것은 부인을 안심시켜 슬며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선백(宣伯)이 제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갔었을 때는 선백을 숙손(

)이라고 불러 군주(君主)의 사자로 높여 부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의 호칭은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27. 권토중래(捲土重來) // 한 번 패했다가 세력을 회복해서 다시 쳐들어옴.

出典杜牧題烏江亭

 

이 말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 : 803-852)<제오강정(題烏江亭)>에 나오 는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

勝敗兵家不可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豪傑 捲土重來未可知

 

오강(烏江 : 安徽省 內 所在)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 : B.C 232-202)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해하(垓下 : 안휘성 내 소재)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江東)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餘 子弟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無面渡江東]’ 부형들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만장(波瀾萬丈)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杜牧)은 오강의 객사(客舍)에서 일세의 풍운아(風雲兒)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는 장사 항우,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애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준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참 조선즉제인(先則制人), 건곤일척(乾坤一擲), 사면초가(四面楚歌)


28. 극기복례(克己復禮) // 과도한 욕망을 누르고 예절을 좇음. 出典論語顔淵篇

 

공자의 대표적 사상은 ()’이었다.논어(論語)에는 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한가? 모든 사람이 때문에 살면서 을 모르고 을 외면한다고 하시며 좋아하기를 색() 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라고도 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도 인()의 정의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안연(顔淵)이 인()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 하루동안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을 묻자,

()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했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29. 금란지교(金蘭之交) // 다정한 친구 사이의 정의(情義) 다정한 친구 사이의 교제(交際) 出典易經繫辭上傳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同人 先號咷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惑出惑處 惑黙惑 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易經 繫辭上傳

 

몹시 친밀한 사이를 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金蘭之交라고 하는 말은 白樂天의 시구에도 나온다.

 

참 고금란부(金蘭簿)


 

30. 금상첨화(錦上添花) //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을 더함. 出典王安石

 

왕안석(王安石)은 북송(北宋) 중엽, 군사비 팽창에 의한 경제적 파탄을 구하려고 획기적인 신법(新法)을 실시한 정치적 귀재(鬼才)일 뿐 아니라 송()나라 시대의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다음 시 <卽事>는 그가 만년(晩年)에 정계를 떠나 남경(南京)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은 남원을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우는데

바람엔 맑은 빛이 있고 이슬에는 꽃의 화려함이 있네.

문앞의 버들은 옛 도령의 집이요

우물가의 오동은 전날 총지의 집이라.

좋은 모임에서 술잔을 거듭 비우려 하는데

 

아름다운 노래는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

문득 무릉의 술과 안주를 즐기는 손이 되어

내 근원에 응당 붉은 노을이 적지 않으리라.

 

河流南苑岸西斜 風有晶光露有華

門柳故人陶令宅 井桐前日總持家

嘉招欲履盃中淥 麗唱仍添錦上花

便作武陵樽俎客 川源應未少紅霞


31. 금성탕지(金城湯池) //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 出典漢書蒯通傳

 

()나라 시황제(始皇帝 : B.C 246-210)가 죽고 어리석은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전국시대 6강국의 후예들이 군사를 일으켜 고을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관청을 점거했다. 그 무렵, 무신(武信)이라는 사람이 조()나라의 옛땅을 평정하고 무신군(武信君)이라 일컬었다.

 

이를 본 모사 괴통(蒯通)은 범양 현령(范陽縣令) 서공(徐公)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는 지금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대로 하시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공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 위급하다는 거요?”

 

사또께서 현령으로 재임한 지난 10년 동안에 진()나라의 가혹한 형벌로 인해 부모를 처형당한 사람, 손발이 잘린 사람,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그들이 사또를 원망하며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오. 그런데, 전화위복이란 또 무슨 말이오?”

 

제가 사또를 대신해서 지금 세력이 한창인 무신군을 만나 싸우지 않고 땅이나 성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책을 말해 주면, 그는 틀림없이 사또를 후대할 것입니다.”

 

그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시오.”

 

이리하여 무신군을 찾아간 괴통(蒯通)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귀공(貴公)이 범양을 쳐서 현령이 항복한 경우, 그 현령을 푸대접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부귀를 바라는 각지의 현령들은 항복하면 범양 현령처럼 푸대접받는다.’며 더욱 군비(軍備)를 강화하여 마치 끓어오르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金城湯池]’ 같은 철벽(鐵壁)의 수비를 굳히고 귀공의 군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땐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 범양 현령을 극진히 맞이하여 그로 하여금 각지의 현령들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기꺼이 항복할 것입니다.”

 

동의어탕지철성(湯池鐵城)

유사어금성철벽(金城鐵壁)


32. 금의야행(錦衣夜行) // 비단옷을 입고 밤에 간다는 뜻으로, 아무 보람없는 동을 가리킴. 出典漢書項籍傳 / ‘史記項羽本紀

 

유방(劉邦)에 이어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項羽)는 유방과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둔 3세 황제 자영(子嬰)을 죽여 버렸다.(B.C 206)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것을 안주 삼아 미인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金銀寶貨)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帝王)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라는 사람이 또 간했다.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합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자신을 과시(誇示)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 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음을 알게된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가 이렇게 말했다.

()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沐猴而冠]처럼 지혜 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잡아 삶아 죽였다고 한다.

 

동의어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

반의어금의주행(錦衣晝行)


33. 기호지세(騎虎之勢) // 범을 타고 달리는 기세. 곧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 형세. 出典隋書獨孤皇后傳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엽인 581,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남편의 뜻을 알고 있던 아내 독고부인(獨孤夫人)으로부터 전간(傳簡)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 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함께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옵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페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나라의 宣帝가 돌아가심을 당하여, 高祖文帝가 조정에 들어가서 백가지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독고황후는 사람을 시켜 高祖에 일러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그러한 것이니, 호랑이를 탄 형세로 내려 올 수가 없으니, 이것에 힘쓰라.”

 

當周宣帝崩 高祖入居禁中 總百揆 后使人謂高祖曰 大事已然 騎虎之勢 不得不勉之.

 

원 말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기호난하(騎虎難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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