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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 - 아내 뺏긴 아픔을 영원한 시로 남겨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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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뺏긴 아픔을 영원한 시로 남겨

대담 ; 이어령, 장덕순

 

 

서울 달 밝은 달과 함께

밤들도록 놀며 다니다가

들어와서야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다리()었고

둘은 누구의 다리()인가.

본시 내 다리()이지만

빼앗거늘 어찌하리.

 

신라 헌강왕 때 처용랑이 지었다는 8구체의 향가. 아내와 역신(疫神)의 간통을 목격한 처용은 그 고뇌를 노래와 춤으로 정화한다. 이에 감복한 역신이 현신하여 앞으로는 처용의 화상(畵像)만 보여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빈다. 이에 연유하여 처용은 역귀(疫鬼)를 물리치는 신으로 승격, 토착 종교화되었다. 조선조까지 전해온 처용무의 몸짓은 추녀도, 버선도, 의상도 그렇듯 상승의 의지를 담은 한국인의 몸짓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 지난번 <노인헌화가> 때도 이야기가 좀 나왔지만 신라의 문화는 고려나 조선 때와는 달리 바다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처용가도 그렇지 않습니까.

 

=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로 놀이를 나갔다가 생긴 일이지요. 지금의 울산입니다. 바닷가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일고 훤하던 대낮이 깜깜해지는 변괴(變怪)가 생겨 동행하던 일관(日官)의 가르침을 따라 동해의 용을 위해 그곳 근처에 절을 지어줄 것을 약속하지요. 그랬더니 구름이 개고, 동해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왕의 덕을 찬양합니다. 그때 동해용이 일곱 아들 중 한 아들을 바쳤는데, 그것이 바로 처용(處容)입니다.

 

= 이 설화(說話)도 그렇지만 신라인들은 바다와 친했다기보다 늘 바다를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수로부인도 바다의 용이 납치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들은 바다 밖으로 진출하려는 생각보다 바다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려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 북방의 대륙 쪽보다 신라인은 확실히 바다 쪽을 경계한 것이 사실이지요. 무열왕(武烈王)이 자기가 죽거든 바다에 장사를 지내라고 했고 그러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말을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나라와 손을 잡아 통일했구요. 그들의 적은 바다 쪽 일본의 해적들이었습니다.

 

= 그 말을 바꿔말하면 신라문화는 대륙보다도 바라를 타고 들어오는 문화와 접촉이 잦았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요. 우선 설화를 분석해 봐도 알 수 있듯이 가락국의 수로왕비는 서남쪽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온 아유타국의 공주이고 탈해왕(脫解王) 역시 먼 바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용성국(龍成國)의 어린 왕자로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주몽같은 북방의 설화는 말()과 관계가 있고 신라 쪽 설화는 배()과 관계가 깊습니다. 대륙과 바다의 차이 즉 북방과 남방의 대응인데 이 처용 역시 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수로부인이나 탈해왕처럼 배를 타고 표류해온 남방계의 이방인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 않습니까.

 

= 그래서 한국 문화가 북방의 대륙에서 왔느냐 남방에서 왔느냐로 가끔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남방계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처용의 예를 듭니다. 아랍 상인이거나 인도 사람일 것이라고요. 사실 고려 때 처용을 노래한 가사(歌詞)에서 그 모습을 묘사한 걸 분석해 보면 확실히 한국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키도 크고 이마도 넓고(웃음).

 

= 후세 사람들은 대낮인데도 갑자기 어두워졌다는 기록은 일식 현상을 가리킨 것이고, 처용은 바로 일식신(日蝕神)인 나후(羅候)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려 때의 가사에는 천하태평 나후덕(羅候德) 처용아비야라고 했지요. 신화나 설화의 기술법을 보면 얼굴색이 다른 낯선 이방인은 모두 용이 아니면 신으로 되어 있으니까(웃음).

 

= 처용은 한자로 음만 적은 차자(借子)일 테니까 그 뜻이 과연 우리나라 말로 무엇이었는가? 많은 학자들이 여러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양주동 씨는 제융, 치융이란 말에서 어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 처용이 이방인이냐 일식신이냐 하고 따지는 것보다 우선 설화나 시에 나타난 처용이라는 인물의 내면적 성격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첫째 처용은 달을 아내보다도 사랑한 풍류객이라는 점입니다.

 

= 그것도 어디 보통 아내입니까? 처용을 동해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잡아두기 위해 왕이 몸소 골라 내리신 여자이니만큼 역신(疫神)이 탐낼 만큼 아름다웠지요. 그런데도 그런 미녀를 혼자 방에 놔두고 밤새껏 달과 함께 노닐었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 이방인이니까 아마 달을 보며 고향 생각을 하느라고 그랬다고 풀이할 수도 있지만 세속적인 지상의 쾌락보다는 초월적인 꿈의 세계를 그리는 시인적인 기질이 엿보입니다. 아내를 뿌리치고 강건너 세계로 달아나려던 <공후인>의 백수광부, 달로 상징된 기파랑, 그리고 피리 소리로 달걸음을 멈추게 한 월명(月明)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지요.

 

= 달을 좋아한 풍류객이었으니까 아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짐작이 갑니다. 역신(疫神)과 간통을 한 그 아내보다 일단 책임은 처용에게도 있지요(웃음). 시구(詩句)에는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닐다가라고 되어있지만 그날만이 아니고 여러 번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을 것입니다.

 

= 둘째로 간통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처용은 현자(賢者)-바보’(wise-fool)형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들어가 자리보니 다리가 네히어라라고 말합니다. 피가 역류하고 가슴이 파열하는 순간인데도 하나 둘 다리를 세어 그것을 숫자로 나타냈어요. 아주 냉정한 수학자입니다(웃음). 신화비평에서는 인물 원형(原形)을 나누는데 처용같은 사람을 현자-바보 즉 겉보기에는 바보 같으나 실은 세상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외로운 현자로 설정합니다.

 

=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누구 것인고라고 말한 대목이 바로 그렇지요. 도둑을 대들보 위에 올라탄 군자라고 부른 것처럼 간부(姦夫)를 향해 두 다리는 누구 것인고라고 말한 처용의 태도는 여유를 넘어 유머러스하기까지 합니다.

 

=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빼앗긴 아내 헬렌을 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이고 그 후편격인 <오디세이>는 자기가 부재중에 자신의 아내(페네로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악한들을 힘으로 물리치는 영웅 오디세우스를 노래부른 것이지요. 서구 문학에서 여성을 지키는 것은 곧 남자의 명예를 지키는 상징으로 되어 있으며(중세 기사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의 심리 발생은 이러한 명예 의식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즉 시를 지어 후세에 남긴다는 것은 후세에 영웅의 공적을 찬양하여 전하려는 명예 의식의 소산이었으니까요. 서구인의 안목으로 볼 때 간부(姦夫)에게 아내를 빼앗긴 처용은 이마에 뿔이 난 코규로 웃음거리가 되는 바보지요. 더구나 그것을 숨겨도 시원찮은 것을 영원히 시로 남겼으니.

 

= 본대 내해다만은 빼앗긴 걸 어찌하랴라고 춤을 추며 물러나지요. <공후인>도 남편을 잃고 어찌하랴로 끝맺음을 했는데 처용도 어찌하랴라는 체념사(諦念詞)로 시를 종결시켰지요. 무력하지요. 이방인이었으니까 아내를 빼앗겨도 어디 호소할 데도 없었으니 그랬을 것이라는 합리적 해석도 있지만, 사실 이때의 어찌하랴는 것은 단순한 체념사는 아니지요.

 

= 그래요. 포시태자(布施太子)는 자기의 재산, 아내, 자식,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눈, 육체까지도 모두 그것을 원하는 자에게 바칩니다. 처용가도 신라의 불교적인 정신 밑에서만 이해될 수 있어요. 처용을 나후(羅候)라고 했는데 그것은 불타의 적자이며 수모를 견디고 참아 이겨내는 인욕행(忍辱行)을 상징하는 불교의 나후라와 연관성을 맺고 있습니다. 간부(姦夫), 말하자면 악이나 적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빨을 이빨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용과 덕으로 굴복시키는 슬기를 나타낸 것으로 봐야 옳을 것입니다. 무력(無力)이 힘이 되고 지는 것이 이기는 간디의 무저항주의도 그런 불교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 역신(疫神)은 처용의 노래와 춤을 보고 즉 그의 덕에 감화되어 무릎을 꿇고 다시는 처용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요. 악이나 폭력을 덕으로 퇴치한다는 것이 처용의 설화와 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뒤에는 처용이 병을 물리치는 힘으로 신격화하여 토착(土着) 종교화하고 처용무(處容舞)는 조선조까지 전해 내려왔습니다. 인형으로 처용의 모습을 만들거나 그 초상을 대문 앞에 그려 붙이거나 그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면 병이 물러난다는 것이지요. 처용은 표면적으로 볼 때 무력자(武力者) 같지만 실은 무서운 역신을 물리친 영웅입니다.

 

= 영웅이며 신이지요. 그런데 서양의 영웅은 아킬레스나 오디세우스처럼 모두 간부(姦夫), 말하자면 역신 같은 악을 근육의 힘, 무력으로 물리치는 호랑이같은 영웅입니다. 그런데 악과 적을 물리치는 우리의 영웅은 지난번에 말한 대로 분노나 고통을 극기의 힘으로 견디어 참아내는 곰과 같은 영웅, 더 정확히 말하면 성자형(聖者型)이지요. 그래서 한국 소설의 전통은 현자-바보형의 주인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 바보온달설화도 그렇고 <서동요>의 막동방도 그래요. 무력을 무력으로 직접 대하지 않고 정신력으로 이긴다는 이야기는 우리 서사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씨남정기>의 사씨 부인도 간악한 교씨부인(喬氏婦人)을 덕과 관용으로 대해 끝내는 이기지요.

 

= 단군신화처럼 곰이 늘 호랑이를 이기지요. <우적가(遇賊歌)>의 승 영재(永才)도 칼을 뽑아든 도둑을 노래로 물리치지요. 영재의 노래를 듣고 감복한 산적들이 모두 머리를 깍고 그 제자가 됩니다. <춘향전>을 봐도 그래요. 변사또는 매질을 하는데 매 한 대 칠 때마다 그것을 운을 삼아 춘향은 노래로써 저항합니다. 이도령이 변학도와 대결한 것도 권력인 마패(馬牌)의 힘 이전에 그 유명한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의 시로써 그의 가슴을 찌릅니다. 역신을 칼이 아니라 시와 춤으로 물리친 처용의 행위는 한국인의 저항적 성격에 한 전형성을 부여하고 있지요.

 

= 그랬기 때문에 향가 중에서도 시적으로는 떨어지지만 <처용가>가 고려조와 조선조의 두 왕조에까지도 계속 영향을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라는 망했지만 처용은 불멸의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설화만이 아니라 춤의 양식도 말입니다.

 

= 간부(姦夫)를 향해 소리치는 폭언이 웃음섞인 시의 말로 승화되고 적을 향해 주먹질을 해야 할 행동이 도리어 평화로운 춤으로 창조되어 나타났습니다. 처용은 이렇게 악의 현실을 평화와 아름다움과 감동의 춤으로 바꿔놓았지요. 이러한 발상에서 병든 생을 건강한 생으로 바꿔놓는 역신 퇴치의 신으로까지 승격된 것입니다.

 

= 처용뿐만 아니라 헌강왕 때에는 서울은 물론 시골에 이르기까지 즐비한 기와집과 담장이 잇달아 있었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고 되어 있으며 이 태평성대에 거리에서는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처용가>는 이러한 시대분위기, 즉 평화롭고 예술전성의 시기의 산물이었습니다.

 

= 그렇지요. 처용의 세 번째 설화적 성격은 예술가 특히 을 상징하는 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처용의 설화가 나오는 <삼국유사>의 헌강왕조에는 처용의 춤만이 아니라 신들이 나와 을 추었다는 대목이 네 번이나 더 나왔습니다. 모두가 춤에 대한 기록이지요.

 

= 개운포에서의 용왕이 춤을 추었지요. 그리고 처용이 역신앞에서의 춤, 다음에는 포석정에서 남산신인 상심(祥審)이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 몸소 그 춤을 배워 추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또 금강령에서 북악의 신이 왕도령이란 춤을 추고 동예전(同禮殿)에서는 연회 때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그 춤 이름이 지백급간(地伯級干)입니다.

 

= 결국 처용 설화는 의 기원에 대한 설화의 하나로 적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춤은 모두 용왕이나 산신이나 지신들이 춘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그렇게 보면 처용 역시 춤의 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지요. 춤을 추면 신이 나고 그 신명에서 초월적인 엑스타시가 생깁니다. 무당들이 춤을 추는 것도 그렇지요. 춤을 추어서 얻어지는 도취, 이것을 설화와 신화의 언어로 기술할 때에는 ()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명난다든지 신난다든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알 것입니다.

 

= 그러니까 헌강왕 때는 태평성대로 환락을 즐길 때라 춤이 많이 유행된 것 같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설화들은 모두 그 당시 추던 춤의 명칭들이고 그 춤에 대한 설화로서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온 거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 여러 가지 춤의 성격을 설화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요즈음 탱고·월츠·고고 다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산신이나 지신이 나와서 추었다는 춤을 설화 내용으로 분석해 보면 대개 그 속도나 분장, 그것을 추었을 때의 느낌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용왕의 춤은 월츠처럼 파도의 리듬을 닮은 춤이었을 것이고 포석정에서 남산신이 추었다는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는 나뭇가지에 바람이 부는 듯한 춤, 금강령 북악신이 추었다는 옥도령은 남성적인 춤이었을 것이라고 추리됩니다(북악의 형상으로). 그리고 지신의 지백급간(地伯級干)은 섹시한 춤이었을 것입니다. 땅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나 바다는 초월적이고 영적이지만 땅의 것은, 현세적이고 육감적인 것으로 대비되지요. 그래서 장차 환락으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춤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처용설화가 이런 춤의 설화 속에 끼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부터 처용무라는 양식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지신이 춘 것과 반대로 달춤천신의 춤이라 할 수 있지요.

 

= 그러니까 처용설화는 춤을 나타낸 설화이며 헌강왕 때 있었던 여러 가지 성격이 다른 춤의 약식 중의 하나를 상징하는 설화라는 말이군요. 그런데 하늘의 춤이라는 추리는 어떤 근거에서.

 

= 어디까지나 추리입니다마는 지금까지 처용만의 설화를 그와 함께 등장하는 다른 설화와 독립해서 읽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를 낳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체를 연결해서 읽어보면 처용은 용왕의 아들이니까 처용무는 용왕무(龍王舞)와 대응을 이루는 춤이라고 해석될 수 있지요. 그리고 남산신과 북악산신은 남북으로 대응되니 그들이 춘 상심무(祥審舞)옥도령(玉刀令)은 또 대응됩니다. 여기에 지신이 나와 추었다는 지백급간춤이 나오므로 , (), ()가 다 나온 셈입니다. 빠진 것이 있다면 ()입니다. 처용은 달과 함께 처용무가 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고쳐보면 바다춤, 산춤, 땅춤, 그리고 하늘의 달춤이지요. 그러고 보면 처용은 추다라는 동사에 을 붙여 명사형을 만든 추움의 차자로 오늘의 이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그런데 처용무는 병을 고친다는 역신퇴치의 주술적 설화로 봐야 하는데 그것과 춤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물론 고려 때 처용무가 있었지만, 다른 춤은 전래되지 않고 설화에 생긴 춤이 아니라 이미 신라 때부터 있어 왔던 춤이라고 추정한다 해도 말입니다.

 

= 중국설화에도 달에는 불사약이 있다고 하여 女常娥의 전설이 있지 않습니까? 달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초생달 - 만월 - 그믐달의 리듬으로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므로 영생(永生)과 재생의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병(죽음)에서 다시 달처럼 회복된다는 상징에서 처용의 춤은 달과 관계가 있는 역신퇴치의 신앙을 낳을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춤은 타란테라 춤처럼 간통한 아내를 보고 처용이가 분노를 이긴 것처럼 그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즉 병으로 볼 때 분노는 열병과 통하는 것이니까 열병(熱病)의 역신을 물리친 것과 같지요. 춤을 추면 분노나 슬픔을 잊게 한다는 데서 처용의 춤이 병을 물리치는 것과 동일화된 설화를 낳은 것이지요.

 

= 그러면 처용의 네 번째 성격은 의신(醫神)이 된다고 할 수 있겠군요. 설화나 신화는 일종의 시적 원형이니까 비유법으로 형성되지요. 아폴로신은 태양신이면서 의술신인데 어째서 이렇게 성격이 바뀌느냐 하면 비유적 전개 때문이지요. 태양은 어둠에서 밝음을 주지요. 병을 육신의 어둠으로 본다면 의약은 그 어둠을 물리치는 광명이니까, 아폴로신을 육체의 비유로 볼 때에는 태양신이면서 의술신이 되지요. 그렇다면 춤이 화나는 마음을 달래는 경우에서 열병을 고친다는 신화적인 사고가 그대로 역신퇴치의 민간신앙을 낳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레비뷰뤼엘의 저서를 보면 원시인의 사고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비유적인 진실이 곧 현실적 진실로 곧잘 반영되지요. 앵도같은 입술이라는 비유가 옛날 사람에겐 입술을 곧 앵도와 현실적으로 동일화해 버리는 사태가 빚어집니다. 옛날의 설화와 신화는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 처용설화를 보면 한국인은 춤으로써 슬픔과 고통 또는 육체적인 병까지 정화(淨化)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 그것이 신바람을 좋아하는 한국인, 어두운 비극과 역사적 수난, 가난과 질병을 물리치는 것은 신바람나는 어깨춤이었어요. 지금도 상춘(常春) 시즌에 보면 부녀자들이 길가에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기뻐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내의 정사를 보고 장이 잘리는 것 같은 슬픔과 분노를 시로, 그 춤으로 물리친 처용처럼 우리는 그렇게 춤을 추었습니다. 춤의 어원은 추켜올리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무거운 마음을, 고뇌의 육체를 하늘로 무한의 높은 공간으로 추켜올리는 상승의 의지, 그것이 처용이었고 춤이었고 한국인의 몸짓이었지요. 기와지붕도 춤을 추듯이, 여자 의상의 선, 버선코의 선까지도 춤을 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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