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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란 무엇인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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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자동차란 무엇인가

쓰기타 사토시

 

 

1장 자동차란 무엇인가

 

자동차는 아편이다. 자동차는 그 사용자에게 저절로 손이 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또 그들의 건전하고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시킨다는 점에서 아편임에 틀림없다.

 

한때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는 문명을 갉아 먹는 흉기가 돼버렸다. 자동차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동차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경향을 확장시키는 도구로 바뀌었다.

 

우리들은 자동차를 100여년 동안 소중히 대접해왔다. 자동차의 발명은 우리들의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 소식은 우리에게 커다란 복음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동차를 많이 만들어내면 만들어낼수록, 또 자동차에 많은 부분을 맡기면 맡길수록 자동차는 은근히 사람의 목을 조르고, 마침내 인간의 마음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들이 해마다 700명이나 살해되고, 수십만명이 부상을 당해 그 고통으로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운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면, 도대체 인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본래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이, 어른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들에게 희생만 요구하고 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이런 희생을 방치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기는 오염되고, 거리는 전쟁터로 바뀌고, 위험 때문에 아이들은 도로에서 쫓겨나고 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데도, 어른들은 너도 나도 아우성치며 자동차에 손을 내미는 기괴한 사태에 대해서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들이 아니다. 자동차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과 인간사회에 도대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인간은 자동차에 의해 보다 풍요로와졌는가. 그리고 보다 인간다워졌는가. 함께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자.

 

1. 이기심을 확대하는 도구

자동차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자동차의 존재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여기서는 우선 인류의 발생사에서 논의를 시작할까 한다.

 

우리들의 기억에서는 망각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시기, 그 때까지 네 발로 기어다니던 유인원의 일종이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이 유인원은 손이 자유로워졌고, 지능의 발달이 진전돼 인류의 선조가 됐다.

 

네 발이 두 발로 됨에 따라 인류가 잃어버린 기능이 있을까? 있다. 그것은 이동능력이다. 두 발로 몸을 지탱하고 이동하는 것은 네 발로 이동하는 것에 비해 두 발의 부담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피로도가 심해진다. 또 주행 속도도 떨어진다. 그래서 인류가 하루에 걷는 거리에는 자연스럽게 한계가 생기게 됐다. 대개 똑같은 크기의 다른 포유류에 비해 인간이 가진 이동능력은 그 최저점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은 보다 좋은 에너지 효율을 발휘하는 이동수단을 고안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심하게 됐다. 그런 노력의 결과 인류는 교통사상 몇 차례 혁명을 경험했다. 예를 들어 사상가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첫째로 문명의 여명기에 이루어진 바퀴의 발명, 둘째로 중세 유럽의 말안장에 달린 등자, 어깨띠, 제철의 발명, 셋째는 15세기 포르투갈인 이 건조한 원양항해선이 그것이다. 그리고 제 4혁명으로 볼베어링의 발명이 그 뒤를 이었다.

 

나아가 다섯째로 내연기관의 발명에 뒤이어 자동차가 등장했다. 특히 이 제 5의 혁명은 기술사나 산업사상 획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문명사나 정신사적으로도 인간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자동차가 자아를 확장한다>고 말한다. 이 말속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다. 자동차에 의해 개인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자기의 능력이 확장되는 것을 실감한다. 그 때까지 쉽게 갈 수 없었던 먼 곳을 비교적 짧은 시간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거의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짐을 운반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탈 수도 있다. 또 바람이나 비, 기온과 같은 기상조건에 크게 좌우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한정된 범위의 공간을, 많은 시간을 들여 육체적으로 피로를 느끼면서 걸어야 했던 인간, 즉 걸어다니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동차는 해방과 비슷한 작용을 했다. 이 해방감은 확실히 <자아의 확장>이라고 부를 만한 정서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자아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아의 구성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아는 두 개의 요소 혹은 경향을 가진다. 그것은 개인성 및 공동성이다. 여기서 개인성이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 집착하고, 어디까지나 자기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경향이다. 여기에 비해 공동성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자동차가 인간 혹은 자아의 확장을 가져온다고 말할 때, 대체 무엇을 확장했다는 것인가. 그 말이 개인성과 함께 공동성을 확장했다면 자아가 충분히 확장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개인성만을 확장했다면, 그리고 또 개인성을 혹장함과 동시에 공동성을 축소했다면 여기서 확장됐다고 하는 개인성을 실제로는 이기심(이기성)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성과의 균형을 추구하지 않은 개인성은 이기성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괄호속에 묶어둘 뿐 아니라,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자동차는 사적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타인과 사회에 여러가지 해악을 미친다. 사람은 자동차가 타인이나 사회에 손해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로부터 얻는 사적 이익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차는 확실히 이기심을 확장하는 도구다.

 

사람들은 많건 적건 자기를 사랑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것이 죄는 아니다. 자기애(自己愛)는 개인성의 원초적 발로로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스스로의 욕구 만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성을 확장하여 타인에 대한 이타적 감정을 기르는 데 실패한다면, 자애심은 쉽게 이기심으로 전화해버릴 것이다.

 

2. 자동차에 의해 싹트는 이기심

우선 자동차가 운전자와 외부 사람과의 사이에 만들어낸 원초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사람은 자동차에 타면 외부 사람에 대해 우월감, 우월의식을 갖는다. 그로 인해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때때로 바깥 사람은 장애물로 인식해 적의를 갖게 된다. 그래서 운전자는 자기 마음속에 이기심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동차가 주는 우월감

자동차에 타면 보행자보다 확실히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는 단지 특수한 기계에 갇혀있는데 지나지 않지만, 빠르게 이동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사람은 자기 능력의 우월성을 신뢰하게 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추월하여 다른 사람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갈 때 희미하게나마 자기 마음속에 우월의식이 자라나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운전자는 스피드에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들고 다니는 물건의 무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비바람이 몹시 심하다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또 한여름의 무더위나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운전자는 자신이 뭔가 선택된, 특별한, 뛰어난 인간이라고 느낀다. 요컨대 자신이 타인보다 뭔가 <위대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 비해 외부의 보행자는 미미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존재로 비치게 된다. 특히 자동차가 달리는 엄청난 속도 때문에 보행자는 풍경의 일부로 화해버린다.

 

그렇게해서 자연히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지게 된다.

인간이 타인과 사귀고 인간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지 않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똑같은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결한 조건이다. 혈연도 지연도 또 직업적 문화적 관계도 없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동차는 인간으로서 교제를 성립시키는 이 불가결의 조건을 갖고 있지 않다.

자동차에 타면 사람은 외부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다. 물론 보행자 역시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보행자도 타인에게 무관심하기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관심의 성격이 다르다. 보행자의 경우는 타인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갖게 된다. 걸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본다. 우리들은 그를 확실한 인간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면 상황은 달라진다. 외부 사람은 모두가 익명으로 된다. 이동하는 행위, 즉 운전에 모든 것이 종속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은 극도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자동차는 또 그 자체로 이미 타인에게 위협을 주고,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 있게 된다. 이때 외부의 인간은 운전자에게 있어서 이미 인간이 아닌 것이다. 차에 타면 바깥의 사람은 목석이 된다.

 

평등의 파괴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걸어다니는 한 많건 적건 평등하다. 걷는 속도도 큰 차이가 없다. 겨울의 혹한에 떨고, 여름의 무더위에 숨이 막히는 것도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사람은 타인에게 눈길을 주고, 타인 또한 그에게 눈길을 준다. 눈길을 주는 한 인간은 주체이면서 눈길을 받는 대상이 되는 한 인간은 객체로 응고하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상호적이다.

 

그러나 사람과 자동차, 다시 말해 보행자와 운전자 사이에는 그런 대등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속도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외부환경에 대한 대응면에서도 양자는 전혀 다르다. 또 운전자는 외부 보행자로부터 눈길을 받지만 그는 그 눈길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 짙은 선팅을 할 수도 있도, 또 차내는 외부보다 조금 어둡기 때문에 차속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상당한 정도로 보행자의 눈길로부터 자신의 몸을 가릴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는 큰 몸뚱이를 가졌다는 막연한 감각이 눈길의 비상호성을 일깨워준다. 게다가 운전자는 필요하다면 곧바로 그곳을 떠나버림으로써 눈길로부터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과 자동차의 불평등이 구체성을 띠는 것은 실제로 사람과 자동차가 만날 때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공감을 느긴다. 예를 들어 어떤 사정으로 좁은 소로나 보도를 양측에서 두사람이 걸어갈 때, 우리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는 등으로 일종의 공감을 느낀다.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꽃피는 인간애, 혹은 인간적 선()으로 가는 통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과 자동차의 관계는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자동차는 반드시 사람에 대해서 자기의 입장을 억지로 밀어붙인다. 이때 운전자가 그것을 의도하는가 혹은 그가 클랙슨을 사용하는가의 여부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동차는 이미 인간의 걷는 속도를 훨씬 능가할 수 있고 인간보다는 훨씬 큰 차체와 중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차에 탄 사람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소외시키고 자동차의 크기나 속도에다 자신의 몸을 늘려 잡게 된다. 자동차는 빠르고 큰 존재라는 점 때문에 운전자는 보행자 쪽이 길을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는 그 존재에 있어서 무언중에 길을 양보하라고 사람에게 요구한다. (예를 들어 운전자의 인격이 고매할 경우 사람은 차로부터 길을 양보받게 되는데 이럴 경우 대단히 황송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차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불평등은 전제돼 있다.)

 

이런 모습은 내게 옛날 왕의 어가행렬을 생각케 한다. 길 가던 백성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오늘날 자동차는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리지는 않더라도 길을 열게 하고 길에서 보행자를 쫓아버리지 않는가. 일정 속도로 주행하고 있다면 보행자는 모두 솔선하여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운전자는 우월의식을 보다 강하게 느끼며 그속에서 풍경처럼 돼버린 인간이 자기와 대등하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대등한 인간관계라는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운전자는 보행자를 평등한 관계라고 보지 않는다. 운전자는 자신의 이동이라는 목적 또는 운전이라는 목적 그 자체 밑에 인간을 위치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 이동을 방해받는다면 이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곧 비용을 줄이는 일이기 때문에 운전자는 그를 이동 자체의 장애물로 보게 될 것이다. 상대가 귀여운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운전자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그 아이는 운전자에게 이동을 방해하는 불법 장애물로 보일 뿐이다.

 

이런 의식이 높아질 때 운전자는 길을 비켜주지 않는 보행자에게 자동차를 추돌시킬 것처럼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때때로 그런 행동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부 예에 불과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지진이 일어난다는 경보가 내렸을 때 응답자의 1.3%가 자기가 급히 피난하기 위해서는 <사고를 내고도 뺑소니 칠 수 있다>고 대답했다(朝日新聞,1980.2.27.석간)는 조사 결과를 두고 그저 가정(假定)의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河原*, ‘마이카-강력한 가족 에고이즘의 상징’, <파시즘의 현재>, 新評論, 106)

 

자동차는 교제를 불가능하게 한다

자동차가 내는 속도, 그 중량과 크기에 따라 외부의 사람에 대한 위험도 달라지지만 실은 그 위험 때문에 자동차는 외부 사람과의 사이에 인간으로 교제를 형성할 가능성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무심결에 길에서 놀고 있고 그 아이의 엄마는 젖먹이를 안고 집밖에서 산보하고 있을 때 이곳을 걷는 사람은 이 상황을 파괴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 때로는 이런 상황에서 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젖먹이에게도 길을 걷는 사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긴 칼을 차고 곤봉을 들지 않은 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는 그 존재 자체가 이미 공포의 대상이다. 자동차는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환경을 파괴하고 이들에게 위협을 주며 위험을 느끼게 만든다. 자동차가 아이들에게 다가가면 그의 부모들이 어린아이의 손을 단단히 잡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자동차는 어린이들이나 일반 보행자로 하여금 자동차 자체를 상당히 광포한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자동차는 통과하는 지역의 상황을 한꺼번에 바꿔 놓는다. 그리고 그 장소에 어떤 공감의 재료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저속으로 달린다고 해도 이미 그 크기와 중량, 잠재적인 위험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또 내부의 차단성에 의해서도 그렇게 된다. 자동차는 유리창과 강철로 만들어진 도구다. 그 도구 속에 몸을 실은 운전자는 확실하게 외부로부터 자신을 차단한다. 그 이면의 무서움은 여기서 나온다. 이따금 검은 선팅으로 바깥을 차단한 자동차도 있지만 어떤 형태의 차도 이 차단성으로 인한 이면의 무서움을 간직하고 있다.

 

차의 내부가 쾌적하면 그만큼 안과 밖 사이의 간극은 두드러진다. 특히 차가 바깥에 가져다주는 비참한 외부효과는 사람과 사람의 교제를 뿌리채 단절시켜버린다.

 

이같은 안과 밖의 명확한 분리야말로 자동차가 주는 어떤 착각, 즉 자동차는 사람과 교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도구지만 때에 따라서는 확실히 공감이나 공동의 즐거움을 가져다줄 때가 있다. 이 기묘한 착각을 설명해 보자.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이 함께 차에 탄다. 푹신한 의자에 기댄다. 실내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오붓한 이야기를 나눈다. 눈앞에 미지의 즐거움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때 차에 함께 탄 사람들 사이에는 짙은 공감의 정서가 흐를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들어가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런 공감의 정서는 더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감은 도착(倒錯)된 공감이다. 자신들의 공감을 높이면 높일수록 바깥의 사람에 대한 공감은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부의 공감대 형성에 몰입하게 되면 그만큼 외부에 대한 공감의 결여는 비참한 상황을 부르게 된다. 상상해보라. 연인과 담소하면서 한편으로 아무 생각없이 흙탕물을 튀기는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이 황량한 광경을. 바깥에 대한 무관심이 커지고 운전자의 관심이 안으로 수렴되면 그만큼 이 명암의 낙차는 더욱 커진다. 따라서 내부의 공감이 공동의 즐거움이 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강고한 교제를 형성할수록 외부 사람에 대한 공감은 잃게 된다.

 

 

2 장 자동차 사고

 

1. 사고의 불가피성

신문과 텔레비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동차 사고 뉴스가 보도된다. 각각의 사고들은 그것이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그 규모는 별 게 아니라는 식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다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일상적인 다반사로 치부되어버린다.

 

앞서 말한 대로 자동차는 운전자의 손이 핸들을 잡게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잃게 만든다는 면에서도 아편이지만, 사고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켜 차를 사용하는 것이 보행자에게 미칠 위험성을 잊게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아편이다.

 

대체 일년에 몇사람 정도가 교통사고로 죽고 다칠까? 일본에서는 숫자를 적게 줄여 계산한 경찰청 통계에서도 매년 1만명의 사람이 죽고 80만명이 넘는 사람이 다치고 있다. 놀라운 숫자다. 세계적으로 본다면 매년 수십만명이 죽고 수백만의 사람이 다친다. 10년 단위로 본다면 한 나라 규모의 인구가 자동차에 의해 죽고 다치는 셈이다.

 

기술사학자 星野傍郞씨는 이 사태를 두고 대량학살병기인 핵무기시스템과 함께 자동차는 <현대 최대의 야만>을 구성한다고 지적한다. (<기술과 인간>, 中公新書, 63). 더욱이 핵무기는 히로시마나 나가사끼 등을 제외하면 지금에 있어서는 가능성의 문제지만 자동차에 의한 살상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현실의 문제다. (나는 핵무기에 반대하고 원자력발전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왜 자동차에는 반대하지 않는지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다.)

 

경찰은 이런 사태에 대해 도로 형태나 교통법규의 개선, 특히 단속강화 등으로 대처하려 하고 있다. 그런 노력으로 사상자의 수를 얼마만큼 줄일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자동차 사고를 없앨 수는 없다. 각 자동차는 그것이 자동차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고를 내고 보행자의 생명을 앗아가거나 다치게 한다.

 

宇澤弘文에 따르면 東海道 신간센은 1964년 업무개시 이래 이용자의 사상자수 <제로>라는 고도의 안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노선과 평행하게 달리며 그와 거의 같은 수송력을 가지고 있는 東名 · 各神 고속도로(각각 1963, 1968년개통)<1971년말까지 17,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宇澤弘文,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岩波新書, 97)

 

자동차 제조 · 판매의 인허가권을 방기한 정부

자동차는 이렇듯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기계이고 매년 1만명 이상 사망자를 내는 상품이다. 정부가 자동차 제조 판매에 대한 인허가권을 처음부터 방기하고 있는 오늘의 사태는 도무지 달라질 수 없는 것일까? 어느 기계가 연간 1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만들어내고 80만명 이상의 부상자를 만들어낼까.

 

그런 점에선 즉각 이 기계의 사용 및 판매 금지 조치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이 기계에 커다란 경제효과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무엇 때문에, 왜 자동차에 대해 그렇게 할 수 없는가. 자동차 자체에는 결함이 없다고 강변할는지도 모르지만 60년대에 시끌벅적했던 <결함차>같은 결함이 아니라고 해도 자동차라는 탈 것은 자동차 시스템 그 자체가 결함 투성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만큼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타격을 주기 때문에 모든 자동차는 결함품이고 결함차인 것이다.

 

예를 들어 식품첨가물을 살펴보자. 식품첨가물은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식품에 넣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후생성에서는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보고 필요한 규제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상품으로 큰 결함을 가진 자동차라는 기계를 제조 판매하는 행위는 거의 무조건이고 그 사용도 거의 자유자재인가.

 

백보를 양보해서 만약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문제를 발생시키는 행동을 유발할 성질을 갖고 있다면 행정기관은 그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 아닌가? 1989년 여자 어린이 연쇄 살해 사건과 잇달아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음란 비디오>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음란 비디오를 유해물로 지정한 각 지방자치단체의 발빠른 대응을 생각해본다. 1990년 소년 소녀 잡지와 나란히 진열대를 차지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하고 여성을 완전히 상품화하여 인간성을 말살하려 한 잡지를 각 지방자치단체가 유해물로 지정 조치한 것도 생각난다.

 

그렇다면 자동차가 매년 1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80만명 이상의 부상자를 만들어내는 상품이라면 경찰청에서는 이들 예에 따라 자동차에 대해서야말로 유해물 지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사고가 나면 자동차메이커는 그 책임을 운전자에게 모두 전가시키지만 자동차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사고를 낼 수밖에 없는 시스템적 결함을 가진 상품이다. 사고로 사람을 죽인 운전자도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운전자도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완전한 상품을 샀다가 치사(致死)의 죄를, 죽음의 불행을 자초한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 자동차의 파괴력

아이들이 도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본 조사가 있다. 그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는 주관적으로 도로는 위험하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자동차의 중량과 속도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파괴력은 속도의 제곱과 중량에 비례한다. 예를 들면 체중 60kg인 어른이 시속 4km의 속도로 걸을 때와 1200kg의 차가 시속 40km의 속도로 달릴 때의 파괴력을 비교해보자. 무려 1 : 2000이다. 2000배의 파괴력을 가진 존재가 위협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보통사람, 예를 들면 체중 60kg의 사람이 시속 4km로 걸어가다가 다른 어른과 부딪쳐도 사람이 죽을까? 그렇지 않다. 다치게 될까?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차가 사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내야 할 속도모델을 어른이 보행중에 가진 파괴력의 크기에서 도출해낼 수 있다.

 

즉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차의 중량이 1.2톤일 경우 시속 0.894km로 달리지 않으면 안된다. (0.894라는 값은 방정식 60×42 = 1200X2을 풀어서 나온 값이다.) 애당초 2000배의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면 - 2000배는커녕 운전자는 차의 구조상 걸어 다니는 보통사람보다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 시속 0.894km로 달리는 것은 운전자의 책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예를 들어 체중 10kg, 시속 1km의 어린이에 대해서 중량 1.2t, 시속 40km의 차는 192천배의 파괴력을 가진다. 과연 운전자는 어린이보다 192천배의 주의를 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운전자는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서는 시속 0.091km로 달리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이런 면에서 볼 때 현재의 자동차 우선 사회의 터무니없는 비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번 부딪치면 사람을 죽이는 거대한 파괴력을 가진 자동차, 레일도 없어서 운전자의 조그만 부주의에 의해서도 예상된 궤도를 이탈하는 극히 불안정한 탈것인 자동차가 엄중히 관리되어 격리된 공간을 달리지 않고 우리들의 생활공간으로 들어와 힘없는 보행자들 사이를, 뼈가 약한 노인들 사이를, 또 한곳에 집중하여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어린아이들 사이를 일상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매년 1만명의 사망자와 80만명의 부상자는 이같은 시스템이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3. 교통 살인, 교통 상해

자동차에 의한 살상은 과실이 아니다.

매일 우리들은 자동차에 의한 살인 뉴스를 접한다. 물론 거것들은 운전자가 자각하면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실>인 경우가 보통이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과실치사><살인>은 명백히 다르다.

 

하지만 법적으로 어찌 되었던간에 우리가 교통사고에 의한 과실치사를 <살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자동차를 이용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과실치사>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일 그가 <과실>을 범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배를 살짝 친다거나 발을 밟는 정도일 것이다. 서로 덩치가 비슷하고 사람이 걸을 때는 대개는 주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도 일단 핸들을 잡으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수십배 수백배 넘는 몸체와 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동차속에 앉게 되는 동시에, 그에 반비례해서 주의력은 대폭으로 떨어져있기 때문에 보행자의 수백배 수천배의 운동에너지를 갖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도로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일반 보행자와 거의 동일한 공간에서 차를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답은 간단명료하다. 보행자와의 충돌이다. 가벼운 경우라면 보행자와의 접촉이다.

 

그러나 운동에너지면에서 보행자의 2000배에 달하는 자동차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이 가벼운 접촉조차도 보행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가는 또다시 명료해진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 사람을 치었을 때 확실히 그는 과실을 범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실>을 범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핸들을 잡는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의지적 요소가 포함되었을 때 <과실>은 단순한 과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의 발생을 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의식하면서도 그 발생을 용인하는 경우 형법상으로는 <과실>이 아닌 <고의>, 다시 말해 <미필적 고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자동차 운전에 의한 <과실치사>를 우리들은 <살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통사고 보도의 결함

우리가 교통 희생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주로 숫자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마치 전쟁의 전황 보고를 듣는 것과 같이 무감각하게 듣는다. 직접 사고를 목격하거나 가족이나 친지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는 한 거의 자동차 사고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사망자 00, 부상자 000>이라고 사고 피해자의 숫자를 들을 때 여기서 우리들은 인간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사망자> <부상자>로 추상화되고 통계의 일부분으로 전락해버린다. 우리들은 피해자가 받는 고통을 우리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물론 우리들은 이따금 교통사고 보도를 통해 구체적인 살아있는 인간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추상화된 <사망자> <부상자>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공감(共感)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요건이 빠져 있다.

 

그것은 피해자에게도 고유한 삶이 있었다는 사실 인식이다. 그에게도 분명 희망과 동경이 있었을 것이며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의 생활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배우며 성장하고 아프기도 하고 고통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그 또한 필사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이해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의 죽음과 부상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매스컴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교통사고를 거의 습관적으로 보도하며 사고 상황에 대한 보도에는 중점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설사 사고의 상황을 보도하더라도 지극히 슬쩍 지나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처참한 사고현장 상황을 전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는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초래된 자동차 사고의 끔직한 결과를 정확하게 전하지 않으면 자동차 사고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피학적인 취미에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매우 슬픈 일이지만 뭔가 미심쩍게 방치되어 있는 이상한 현실의 배후에 얼마나 많은 사실이 감추어져 있는가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은 교육상 아이들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에 앞서 이러한 처참한 현장을 매일같이 일상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조가 당연한 것으로 유지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피해자가 운전자 자신이 아닌 보행자일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가해자가 운전자일 경우 그 가해자가 어떤 이유로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보도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보도된다면 왜 현실에서 일어나는 교통사고가 불합리한 성격의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보일 것이다. 한쪽은 특별한 긴급성이나 불가피성 필연성도 없이 단순히 자동차로 이동하기 위해서(예를 들어 통근, 통학, 쇼핑, 상업, 그리고 더 심하게는 레저나 유희 등) 길을 누빌 때, 다른 한쪽은 죽음을 당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4. 피해자가 받는 것은 무엇인가

그럼 우선 사고가 초래하는 참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해본다. 조금 길지만 玉井義臣씨의 <교통희생자>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

 

그해 1월 시나가와 소방서, 이른 새벽의 정적을 깨는 긴급지령 벨이 울렸다. 현장은 고단다(五反田). 구급대원은 곧바로 구급차에 올라타고 현장으로 직행했다. 64년형 도요페트 글로리아의 운전석에 청년 한사람이 앞으로 구부린 자세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담당 구급대원은 끌어안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눈이 없었다. 앞유리가 운전자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코는 뼈가 깨져 늘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가 낭자해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의식은 몽롱한 상태였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정차중이던 건축자재를 가득 실은 화물 트럭에 추돌한 것이다.

 

운전자 옆에 앉았던 청년은 코와 입술 등 안면에 유리가 박힌 채 의식불명 상태였다. 구급요원은 <즉사>인 것 같다고 말했다. 뒷좌석에 있던 20, 21세의 아가씨들 중 한사람은 거울에 받혀서 출혈로 뭉쳐진 핏덩어리가 보였고 또 한사람은 왼쪽 대퇴부 복합 골절로 하얀 뼈가 살을 찢고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그들 중 세사람은 차밖으로 퉁겨져 나와 의식을 잃고 있었다.

 

사고 현장의 모래에 안구가 떨어져 있는 예, 귀가 떨어져 나간 예, 장이 파열된 경우, 수족이 복합 골절된 예 등등.

 

교통사고의 처참함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는 예다. 그런데 이것은 운전자 사례이고 보행자의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면 보행자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는데, 한가지 예를 인용한다.

 

어느 삼거리에서 삼륜 트럭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도록 차를 세웠다. 그 사람은 건너편 보도로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정차중인 삼륜차를 추월하려는 승용차가 맞은 편에서 차가 오는 것을 보고 급히 핸들을 꺾었을 때 삼륜차를 들이받았다. 추돌을 당한 삼륜차는 보도로 올라가 이제 막 횡단보도를 건넌 보행자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돌담과 삼륜차의 범퍼는 결혼을 앞둔 여자의 우측 발목을 그대로 절단해버렸다. <차라리 죽여 주세요 !> <차라리 죽여 주세요 !>라고 그 여성은 절규했다.(36)

 

 

머리외상(頭部外傷)과 후유 장해

교통사고 통계에서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자수이다. 그러나 고도의 자동차화 사회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 선고>를 받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생명선고>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교통사고에 의한 이유없는 죽음은 참으로 비참한 사건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가용승용차의 보급에 의해 죽음 이상으로 비참한 삶에 언제 직면하게 될지 전혀 알수 없는 불안속에서 살고 있다.

 

교통사고에서 사람들은 종종 머리에 강한 타격을 입는다. 특히 보행자의 경우 거의 예외가 없다. 교통사고 부상자 가운데 대략 절반 정도가 머리나 뇌에 손상 - 뇌좌상, 두개골내 혈종 등 -을 입게 된다. 또 뇌를 다친 사람의 약 절반 정도는 뭔가 후유장해가 남는다.

 

머리 외상에 의한 후휴증은 다양하다. 수족 마비, 즉 반신불수나 전신 불수, 언어장해, 시각장해, 청각장해, 두통, 이상성 간질, 지능이나 정신장해, 신경통 등(<교통희생자>, 홍문당, 40) 다방면에 걸쳐 후유증이 나타난다.

 

이런 장해들이 가벼운 경우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그러나 교통사고에 의한 머리외상의 후유증은 그 증상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자동차에 의한 거대한 운동 에너지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그 정도가 심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날이 늘어가는 아스팔트 포장과도 관련이 있다.) 심한 후유증을 가진 사람의 인생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머리외상자 가운데 중상자는 20% 정도지만 그렇다고 해도 1년 동안의 부상자수(경찰청 발표)80만명이라고 했을 때 40만명이 머리외상을 입고, 그 중에 20만명이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8만명은 중증 장애자로서 절망속에서 인생을 보내야 할 처지에 빠지게 된다.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계속 잠을 자던 아이가 갑자기 눈을 뜬 것은 1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 퇴원할 때 다섯 살 난 그 아이는 갓 태어난 어린애와 똑같았다. 처음에는 무릎으로 기다가 점차 게처럼 옆으로 걸을 정도가 되었지만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은 중단댔다. 그러나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정도 유아기를 벗어날 무렵인 3학년이 되면서 그 아이는 학습능력이나 운동신경 등에서 다른 아이들과 큰 차이가 벌어져 반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4학년 2학기에는 정신박약아로서 특수학교로 옮겨야 했다. 지능지수는 70이었다. (<교통희생자>, 홍문당, 73)

 

2개월 정도 지나자 상처는 아물었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3년이나 지났는데도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특히 심하게 아팠다. 어깨와 가슴도 때리는 듯 아팠고, 숨이 가빠 괴로웠다. 텔레비젼 소리를 조금만 크게 해도 머리가 윙윙거리며 울렸다. (같은 책, 74)

 

그는 일본 통운의 운전기사였는데 3년전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크게 다쳐서 입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노이로제로 고생해오다가 후유증이 재발, 3개월 가량 입원했다. 작년 9, 겨우 S국민학교 직원으로 채용돼 <이제는 안심>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지 얼마 안되어 부인이 일곱 살 난 장녀와 친정에 가고 없는 사이에 열한살 난 장남을 망치로 때리고 자신은 왼쪽 손목의 동맥을 면도칼로 끊어 자살했다. 이런 일이 있기 열흘 전쯤 아는 사람에게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생활도 어렵다. 앞으로의 일 등은 생각하기가 힘들다. ……>라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같은 책, 74)

 

우리들이 매일 아무렇지 않게 듣는 <사망자 00>이라는 보도의 이면에는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식물인간 · 동물상태 환자

오늘날의 대뇌생리학 지식으로 본다면 뇌세포는 비재생계(非再生系)이다. 즉 뇌세포는 일단 파괴되면서 회복불가능하다. 위에서 언급한 후유증 환자는 뇌손상을 입긴 했지만 파괴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더라도 피해자의 노력에 따라서 어느 정도 사회복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뇌세포가 파괴된 경우라면 그들에게는 이미 사회에 복귀할 희망은 없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생을 완전히 박탈당해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식물 상태> 혹은 <동물 상태> 환자로서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새 <>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특히 식물상태 환자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유동식만 먹을 수 있으므로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고 누워만 있음으로써 운동부족에 만성빈혈 등을 싫든 좋든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이나 친지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간병을 계속해 주느냐에 따라서도 환자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오래도록 극진한 간병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해서 환자들의 절반 정도는 1년 이내에 사망하며, 그 외의 환자들도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이 대개는 평군 3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환자를 추적한 르포 기사를 인용해본다.

 

한편에서는 쉴새없이 마구 차를 팔아대고 있다. 1년에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살상하는그리고 병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식물상태의 목숨을 10, 15년간 부지해가고 있다. 생명존중과 생명경시 혹은 무시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藤田眞一, <식물인간의 기록>, 朝日新聞社, 182-3)

 

현재의 자동차 교통체계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고 대중교통 수단보다 자가용차를 선호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수천인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그보다 더 많은 시민을 불구로 만드는 교통체계를 암묵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세태속에서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비하면 풍작을 기원하는 원시사회에서 한두 사람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같은 책, 196)

 

5. 남겨진 가족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 교통사고가 유가족을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몰아넣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남겨진 가족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또 과연 아이들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사이다마 현에 거주하고 있는 S부인(41)<조금만 조금만 더 살아보자>, 오직 그것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S부인은 어린아이 둘과 병약한 자신의 몸을 이끌고 망연자실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멏번이나 죽을 생각으로 약을 먹으려 했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조금만 더 >를 되뇌이며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다.

 

남편이 사망한 것은 1970면의 일, 뺑소니 사고였다. 상반신을 치이는 중상을 입고 의식불명이 된 지 이틀만에 숨을 거두었다. 세 살 난 딸과 갓 돌이 된 아들이 아빠 없는 자식들로 남겨졌다. 뺑소니 때문에 보상금은 전혀 없었고 생명보험에서 나온 30만엔이 목숨의 대가였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사이가 좋았던 친척들도 <죽은 다음에는 관계없다>는 듯 차갑게 대했다. <아이들을 각자 이집저집 나눠서 떠맡겠다>는 소리는 더욱더 괴로웠다.

 

<갈수록 생활이 힘들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뻔한 일이고, 정말로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곁에 없었다면 저는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 없었겠지요>라고 부인은 말한다. 생명보험에서 보상받은 30만엔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바닥이 났다. 당시에는 아이들도 어렸으므로 누구에게 맡기기도 힘들어 일하러 나갈 수가 없었다. 친정에서 매월 5천엔을 받아 목에 풀칠만 할 뿐, 집에 쌀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물만 마시며 지내거나 친정에서 쌀을 빌어오기도 했다.

 

작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곧 일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나일론 포대 제조공장, 시간당 130. 그래도 일이 생긴 것만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신나와 기계에 치는 기름으로 목이 아프고 심장이 약해져 병원에 다니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사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일했지만 그것도 1년이 되니 한계상황에 다다라 출근을 못하는 날이 많아지고 결국 회사로부터 실직을 당하게 되었다.

 

병기운이 사라지자 집 근처의 햄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햄을 싸는 비닐을 만드는 작업으로 <130상자>의 목표 달성을 위해 거의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렇게 해봤자 월 6만엔의 수입이었다. 한 번 나빠진 심장이 점점 악화되면서 큰애 출산 이후 아팠던 허리와 다리뼈가 매일 욱신욱신 쑤셔왔다. 그 뒤 1년도 못되어 감기가 악화, 40도의 열이 나흘이나 계속되어 병원에 입원했고 곧바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회사에서는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큰딸 T양은 가정의 상황을 보다 못해 고등학교 진학을 단념했고, 중학교 졸업후 곧장 집 근처의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많은 수입을 올리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공장에 나갔다. 남동생 N군도 직업훈련학교에 다니고 있다. 내년이면 취직하는데 <장래에는 공업 관계의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를 편하게 해드리렵니다.>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이것은 <교통 유가족학생의 모임>에서 편집한 <지구는 원래 보행자 천국>(일본소비자협회)에서 인용한 것으로, 교통유가족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운전하다 목슴을 잃었을 때 위와 유사한 처지에 가족들이 처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비장한 각오로 운전하는 것일까. 또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부상당하거나 죽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과 그 가족들에 대해서도 비장한 각오를 하라고 말할 권리를 가진 것일까.

 

 

살인 면허

13개월 된 딸을 잃은 어떤 어머니는 운전면허 책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거나, 운전면허를 따겠다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 되면 <‘잠깐만요. 운전면허를 따는 것은 살인면허증을 손에 넣는 일입니다.’라고 외치고 싶어진다고 한다. (石井文夫, <다가오는 악마> 41)

 

실제 <살인 면허 운운>은 진실의 얘기이다.

사람은 걷는 한 보통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며 그 가능성조차 가지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자동차 핸들을 잡으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거의 확률의 문제가 된다.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실적인 가능성조차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어머니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 길을 걷는 것이 목숨거는 일이라는 현실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에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딸아이(첫째딸이 죽은 후에 태어난 아이)의 웃는 얼굴을 넋을 잃고 보면서도 과연 이 아이의 생명을 건질 수 있을까 하는 공포가 항상 따라다닙니다>라고.

 

운전자는 이 어머니의 불안을 근거없는 것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일까? 과장이 심하다고 이 발언을 일축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아이들의 눈물겨운 노력

매년 700명의 아이들이 실제로 자동차에 의해 살해되고 있다고 했다. 이 숫자가 과연 적다고 볼 것인가. 그러나 사고의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도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얼마만큼 주의를 해야만 하는지를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다음 시를 읽어 보자.

 

이 작은 나라에 넘치는 차 / 어디를 걸어도 머리로부터 차, 차라는 말이 떠나질 않아요. / 아침에 학교갈 때, 앵무새 같은 엄마의 소리가 다가와요 / <차조심해라> / 세 번 정도는 똑같은 말을 들어야 하지요 / 나도 <알고 있어요>라고 세 번 대답하고요 / 그리고 <엄마도 조심하세요>라고 대답하지요 / 어머니도 <알았어요>라고 대답하지요 / 이것이 우리집의 진지한 인사말이에요. (奧出昌子, 국민학교 3학년)

 

오늘날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거의 이런 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종일 이 말이 몇번 부모의 입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부모는 아이가 꽤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자동차가 위험한 것인가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가르친다. 함께 길을 걷게 되면 몇번이고 길 옆으로 걸어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심지어는 아이가 도로에 뛰어들면 뺨을 때려서라도 깨우치게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매년 아이들의 희생이 700명선에 머물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이같은 진지하고 눈물겨운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피해자인 아이들이 차조심 때문에 손바닥으로 맞아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본말이 전도된 사태가 아닐까. 본래 맞아야 할 사람은 이렇게 해서 아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운전자 쪽이어야 할 것이다. - 저자 주). 이 시는 이렇게 계속된다.

 

넓은 길도 없고 우리가 다녀야 할 곳을 차가 다녀요 / 만약 자동차회사 사장의 소중한 아이들이 나의 자상했던 아버지처럼 / 뒤에서 쫓아온 차에 치어 죽임을 당했다면 / 그래도 차를 만들어 팔까요 / 그리고 텔레비젼에서 멋있다든가 성능이 뛰어나다고 말하면서 / 화려하게 선전하고 싶어질까요 / / 이렇게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많은 차가 필요한 것일까요 / 차가 적어지는 대신 나라가 가난해지고 / 우리집이 가난해져도 /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편이 훨씬 좋지요 / 없어져버려라, 자동차 따위는 /

 

우리들은 이 아이의 괴로움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이 아이가 제기한 새로운 가치관을 설득력 있게 부정할 수 있을까? (이 아이의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위에서 자동차에 추돌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이 시는 1972년 스톡홀롬에서 열렸던 제1회 세계환경회의에서 소개되었다.)

 

6. 현대의 불안

오늘날 인류는 엄청난 생명이 희생당하는 불행을 치르면서였지만 어디까지나 생명 존중을 기조로 하는 국제 관계나 정치구조를 만들어왔다. 이 영향은 문화 전반에서부터 시민도덕, 또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파급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인류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구조의 불안을 만들어버렸다. 우리들은 극히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24시간 내내 생명의 위험에 처해 있어 언제 처참한 죽음에 이르게 될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비참한 삶에 직면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다양한 상황하에서 생명의 위험을 받아 왔다. 그러나 富山和子씨가 지적한 대로 이런 생명의 위험에 대한 불안은 오늘날 자동차가 가져온 불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전의 불안은 어디서건, 어떤 인간이건 항상 짊어지고 있는 숙명적인 불안( <자동차여 우쭐대지 말지어다>, 사이마르출판회, 30)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은 우리들 모두에게 예외없이, 그것도 날마다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따라다닌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몇분의 1초 사이에 일어나는 판단착오가 인간의 생사를 결정해버린다.> (같은 책)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불안속에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예전에 아이들이 지금처럼 생명의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예전에 우리 어른들이 이 정도까지 아이들을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한 적이 있었을까.

 

예전에 아이들은 사회 전체에 의해 지켜졌었다. 그런데 오늘날 아이들은 어른들이 가져다준 위험에 몸을 떨며, 그리고 실제 흔히 어른들의 행위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3 장 신체와 정신에의 영향

 

이제 자동차가 가져오는 다른 해악에 대해서 알아보자. 배기가스, 소음, 진동, 저주파 진동, 그리고 (특히 눈이 많은 지역에서의 스파이크 분진 등이 그것이다. 최근 자동차의 이산화질소오염이나 자동차 소음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고 있다. 또 대도시 주변으로 광역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일같이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1. 배기가스에 의한 대기오염

옛날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도시화가 진행되고 가로등 등에 의한 <광해(光害)>에 의해 어렴풋한 별빛마저 차단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동차 배기가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고베의 옛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백만불짜리 야경>도 배기가스 스모그로 이젠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이 정도의 문제는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 배기가스가 유발하는 심각한 해악은 호흡기질환과 폐병을 늘리는 데 있다. 수년내에 현재의 사망률 1위의 위암을 폐암이 앞지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배기가스에 포함돼 있는 다량의 발암성 물질이 착실히 우리들의 폐를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아울러 발암성 물질은 이외에도 자동차의 브레이크나 타이어, 아스팔트 등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천식환자, 만성기관지염 환자를 만든다.)

 

천식은 괴롭다. 가래는 잘 때 고이고 기도(氣道)는 바깥 기온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천식의 발작은 밤중이나 새벽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발작이 일어나면 아무리 가벼운 증상이라고 해도 괴로워서 누워 있을 수가 없게 된다. 누워 있으면 가래가 기도를 막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몸을 일으켜 세워야만 하는데 그 사이에는 짧은 호흡밖에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금방 산소결핍상태가 된다.

 

어쩔 수 없어서 심호흡을 하면 이것이 또 기침을 유발한다. 도한 발작이 심할 때에는 연달아 나는 기침 때문에 숨을 쉴 여유조차 없어져버려 질식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정확하게 말하면 천식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생긴다. 즉 집안의 먼지, 벼룩, 체질상의 문제, 정신적 이유, 또 특정의 자극물(특히 화학물질) 등이 그 요인이라고 추측된다. 혹은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천식에 걸린다. 그러나 자동차 배기가스에 의한 천식환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교통량이 많은 몇차선의 도로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천식이나 기관지염 환자가 많아지는 것만 보아도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기침이 계속되거나 가래가 많이 나오는 증상, 더 나아가 목의 통증이나 재채기, 콧물, 코막힘 같은 증상도 큰 도로에 가까울수록 많아진다. 예를 들어 4차선 도로에서 100미터 이상 떨어진 장소에 비해 도로 주변에서의 천식 발생률은 50%나 높아진다고 한다.

 

배기가스는 자동차 주행에 수반되는 공기의 흐름에 의해 엷어져서 서서히 확산된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배기관에서 도로상에 배출된 후 도로의 양옆, 요컨대 <보도 부분>에 체류한다. 게다가 배기관에서 나온 그대로의 고농도의 상태로! 이 배기가스는 물론 공기의 흐름에 의해서 어느 정도 엷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기중에 비해 도로 주변의 공기 흐름의 규모는 매우 작을 것이다. 게다가 지상에서는 건물에 의해서 배기가스의 확산이 방해받는다. 이 때문에 건물 주위의 보도는 배기가스로 가득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일반 보행자들에 섞여서 아이들도 걸어다니게 된다. 아이들은 키가 작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고농도의 배기가스를마시고 있음에 틀림 없다. 덤프트럭의 경우 배기관이 아이들의 얼굴에다 배기가스를 내뿜고 다니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어릴 때 상한 폐기능은 성인이 된 뒤에 아무리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생활한다고 해도 완치될 수 없다고 한다.

 

최근 대기 오염도 한가지 요인으로 작용해서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는 아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심한 가려움증에 시달리는데 이를 참지 못해 계속 환부를 긁어대기 때문에 몸이 켈로이드(keloid, 피부의 상처가 아문 뒤에 비정상적으로 생기는 결합조직의 종양) 증상처럼 부어오르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렇듯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훨씬 많은 피해를 자동차로부터 입고 있다.

 

나는 자동차의 배기관이 차체의 내부를 향해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몽상을 하곤 한다. 밀폐된 차내에 배기관을 끌어다댄다면 사람을 죽일 정도의 배기가스가 될 것이다. 그것이 운전자 자신의 주위에 뿜어진다면 그는 곧바로 숨이 막혀서 운전같은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왜 운전자는 외부의 사람을 행해서라면 이 배기가스를 뿜어대도 좋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대기중에 확산된다 하더라도 직접 내뿜어질 경우 외부의 사람이더라도 같은 식으로 숨이 막힐 것이다. 금방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닐지라도 배기가스는 틀림없는 독가스다.

 

배기가스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곧바로 이산화탄소로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배기가스에 포함되어 있는 일산화탄소는 미량이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독가스이다. 일산화탄소는 즉시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산소의 흡입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위험한 물질이다. 조금만 마셔도 두통, 구토, 어지럼증 등의 증상을 일으킨다.

 

천식이나 기관지염을 일으키는 것은 이산화질소이다. 오늘날 이산화질소는 여러 곳에서 배출되지만 그 최대의 원흉은 자동차이다.

 

황산화물, 질소산화물에 의한 산성비, 산성안개도 심각하다. 19901015일의 <적기(赤旗)>는 나가노현과 기후현 경계 부근의 노리쿠라다케의 산꼭대기에서 pH 1.4-1.6(이 산성도는 축전지의 희류산에 필적할 만하다고 한다) 의 산성 안개가 측정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산성안개는 비와 달라서 대기중에 안개 상태로 부유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시면 폐포는 그 산에 의해서 녹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가 배출하는 다량의 이산화탄소는 지구 온난화의 원흉이다. 또한 탄화수소(이것은 탄소와 수소가 결합한 유기물질의 총칭)는 질소산화물과 섞여서 강한 자외선 밑에서 광화학반응을 일어켜 이른바 <광화학스모그>를 만들어낸다. 또 탄화수소 중에는 발암성물질도 많다. 대기 중에서의 체류시간이 길어 인체에 영향을 주기 쉬운 부유입자상 물질 - 이것을 많이 내뿜는 것은 특히 디젤엔진 자동차다 - 은 발암물질 덩어리다. 또 최근에는 이것이 꽃가루 알레르기를 증가시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또한 더러워진 공기에서는 광합성의 속도가 큰 폭으로 저하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은 직접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피해에는 무감각할 때가 있다. 물에 녹아 목에 부착됨으로 해서 통증을 주는 황산화물과 달리(이것 역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이산화질소는 색깔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그 배출량을 문제로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산화질소는 용해성이 별로 없는데다 목에 부착하지 않고 기관지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폐포까지 병들게 한다.

이제 대기오염은 대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선 지방의 소도시나 농촌에 이르기까지 자동차로 넘쳐있는데다가 도시의 오염된 대기가 기류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까지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2. 소음에 의한 수면 방해, 정서 불안

<토메이 고속도로를 부숴버리고 싶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칸노 유키오)

이것은 東名(토메이) 고속도로변에 사는 국민학생이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아니 고속도로변만이 아니라 지금은 모든 곳이 자동차 소음으로 가득찬 시대이다. 간선도로 주변의 가정에서는 벌써 자동차의 소음 때문에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사태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자동차 회사들은 한대한대의 차의 소음도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고 하지만 차의 보유대수가 늘어나면 결국은 도로아미타불이다.

 

한대한대의 자동차 소음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한 대의 자동차가 어느 곳을 달려서 도대체 몇사람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일까. 한 대의 자동차가 도대체 몇사람의 정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일까?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람에게 소음은 대단한 폭력이다. 하루의 피로를 풀려고 잠을 청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자동차의 소음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잔혹한 처사이다.

편안한 수면은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보편적인 요소의 하나다. 이것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오늘날 지나친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그런 평온한 수면을 거의 얻을 수 없게 돼버렸다. 기계문명은 전진한다. 그와 동시에 전반적인 소음은 증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 대응해서 강하고 견고한 귀를 갖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들의 외이(外耳)는 내이(內耳)의 뚜껑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변함없이 옛날부터 두 개의 귀로 듣고 두 개의 귀를 연 채로 자는 것이다.

 

이밖에도 자동차 소음은 다양한 피해를 가져다준다. 도로변 주민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화를 내기 쉽다> <답답하다> <안절부절못한다> <머리가 아프다>같은 불안 증상은 대기오염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진동이나 소음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常俊義三씨의 지적이다.

 

실제로 고농도의 소음에 계속 노출되면 사람은 평정심을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고동이 높아지고 호흡은 빨라지며 결국에는 양 귀를 막고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답답하다> <안절부절못한다> 라는 흔한 표현의 배후에는 얼마나 큰 사람들의 괴로움이 감춰져있는 것일까? 이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 처하면 - 서민에겐 보통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 소음에 의해 일어나는 답답함이나 정서불안은 몸과 마음속에 파고들어 결국 신체의 부조화와 심리의 동요를 가져올 것이다.

 

실제로 소음 수준의 높이는 상병률(傷病率)에 영향을 주어 인간 심리에도 큰 흔적을 남긴다고 알려져 있다. 西村씨는 평균 소음도가 60혼인 곳과 비교해볼 때 평균 72혼인 곳의 상병률이 2배에 달하며 아동심리 테스트 결과 소음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억울성(抑鬱性), 우울한 나머지 비관적이고 음울한 기분이 되는 것), 기분이 변하기 쉬움, 신경질(불안심리, 노이로제 증상, 신경질) 3가지 특성이 타지역보다 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소음문제가 정말로 심각함을 더해가는 것은 - 뒤에서 다룰 저주파음(진동)과의 관계로 다시 거론하겠지만 - 소음에 의해서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가족관계조차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자동차 소음을 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기를 명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이웃에 폐를 기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스테레오의 볼륨을 크게 해놓고 듣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누가, 어디서 소음을 발하고 있는가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차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차는 이동하는 도구다. 더욱이 자기집 둘레를 빙빙 돌기 위하여 차를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를 타고 타인들 사이를 달리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집 옆에서 소음을 발하고 생활의 평온을 흐트러뜨리거나 수면을 방해해 놓고선 곧바로 그곳을 떠나 버린다.

 

피해자에 대해서 가해자가 익명이라는 점이 자동차에 의한 소음 가해의 특징이다. (물론 이것은 차에 의한 다른 피해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다른 사람의 집 창문에서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건전한 기본상식이다. 그러나 사람은 차를 타면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된다. 밤에, 차로 여기저기를 달리면 대체 몇사람의 잠을 방해하는 것일까. 몇사람의 잠을 깨뜨리는 것일까.

 

이런 차의 소음과 더불어 클랙슨 소음은 사람의 정신을 초조하게 만든다. 당돌하게 울리는 경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일반의 자동차 소음보다 혼 수가 높은 클랙슨 소리는 사람을 깨운다. 그리고 사람들이 평온하게 생활할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물론 차의 경적은 일정한 실용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본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사용되고 있는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운전자는 기껏해야 인사를 위하여 혹은 자신의 소재를 알리기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단지 아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무심코 경적을 울린다. 자동차는 한 대가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환경를 확실하게 침해하지만 무심코 쉽게 사용되는 클랙슨 소리에 의해 환경은 더욱더 훼손된다.

 

주차장 소음에 대해서

사람은 자신이 사용료를 내고 이용하는 주차장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불평을 들을 소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운전자들은 대낮에는 물론이고 이른 아침이나 깊은 밤중에 그 어떤 소음을 낸다 해도 아무 상관없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꼭두새벽부터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고 문을 여닫는다. 동절기가 되면 몇분 몇십분에 걸쳐서 시동을 켠 채로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엔진의 진동이 집집마다 전달된다. 또 주변은 배기가스로 가득찬다. 그렇게 만들어놓고서 자동차는 주차장을 나온다. 그런데 알반주차장은 비용절감을 위해 자갈만 깔린 곳이 많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가 나올 때마다 자갈이 밟혀 부근의 주민들은 이른 아침의 기분 좋은 잠을 빼앗긴다.

 

물론 이것은 자동차가 주차장에 돌아올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밤은 물론이고 깊은 밤중에도 자갈 밟는 소리를 내며 주차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금방 주차할 장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몇번이고 핸들을 고쳐 돌린다. 그때마다 자갈이 구른다. 그렇게 겨우 주차한 다음 문이 열린다.

 

때로는 <맹렬한> 스테레오의 소리. 심야에, 그것도 귓전 가까이 들린다면 누구든 맹렬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운전자는 이것도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고 닫고 문을 여닫고, 때로는 다시 닫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승자끼리의 대화나 주차장 이용자끼리의 대화 소리, 심할 때는 클랙슨 소리까지...

 

이렇게 해서 기분 좋은 밤의 수면이 또다시 무자비하게 깨지고 때로는 그 이후의 편안한 잠을 오랫동안 빼앗기도 한다. 이것이 반복될 때 대체 사람들은 언제쯤이나 잠들 수 있을까.

 

때로 사람들은 본래의 주차장 이외에도 여기저기 차를 주차한다. 때문에 소음 피해가 더욱 확장된다. 이래서 주차장 같은 것이 없는 구역에 사는 축복 받은 사람들도 자동차의 발진, 정차, 문의 개폐에 동반되는 소음의 피해를 받기도 한다.

개인 소유의 차고에서도 여기서 나는 소음이 사람들의 수면을 방해하고 깨뜨린다. 이 경우에는 셔터에서 나는 요란한 철제 음향까지 추가된다.

 

3. 진동, 저주파 진동

진동과 소음을 우리들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진동과 소음은 모두가 에너지를 파동의 형태로 우리들이 있는 곳에 전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또한 그것이 인체에 가져오는 증상에 있어서도 유사점이 상당히 많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일반적인 진동, 즉 지반 진동은 대형차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로에 홈이나 구멍 등이 있을 경우 보통의 경자동차에 의해서도 진동은 쉽게 일어난다.

 

대형차가 고속으로 달릴만한 장소에서는 진동의 피해 정도가 심각하다. 전형적인 예를 들면 치바현 기미즈의 <덤프길>에서는 앙케이트 조사 결과 진동은 <어쨌든 지진 같다> 라고 답한 사람이 과반수에 달한다.(단 여기에는 트럭 주행에 의해 동반되는 풍압에 의한 영향도 포함돼 있다고 본다) 또한 <뇌졸증으로 누워 있던 노인이 이불 위에서는 울림이 있어서 안되기 때문에 침대로 옮겼다> <타일로 붙인 목욕탕이 세 차례나 깨져 스텐레스로 바꿨다.> 등과 같은 진정도 들어왔다고 한다.

 

또하나 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인 지반 진동이 아니라, 저주파음에 의한 공기 진동이다. 최근 고속 고가도로 주위에서 특히 문제가 된 것이 이것이다. 저주파 진동은 자동차가 통과할 때에 고가교가 흔들리면서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저주파(200헤르츠 이하)이기 때문에 소리로써 감지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두통, 답답함, 불면> 이라는 전형적인 증상 이외에도 <어깨 결림, 머리 무거움, 어지럼증, 가슴 등의 압박감, 심장의 두근거림, 구토, 식욕부진, 손발저림, 불안감이나 그밖의 불안을 호소하는 다양한 증상이나 코피 쏟음> 등 피해자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저주파에 의한 진동은 고속 고가도로 주변이라는 특별한 장소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빈번하게 경험하는 것은 엔진의 공회전에 의한 저주파 진동이다. 소형차라도 엔진을 공회전하는 차가 내는 진동은 창이나 블라인드에, 또 방안의 공기에 공명하여 방안에 있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할 정도이다. 특히 대형차가 내는 진동은 엄청나다. 수십 미터 떨어져 있어도 대형차에서 내는 진동은 주위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창이나 블라인드를 떨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마져 떨리게 할 정도이다.

 

물론 저주파 진동은 가정용 전기 제품에서도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체로 특별히 문제삼을 정도의 피해를 가져 오지는 않는다.(단 중앙 난방, 그밖의 에어컨 종류나 석유 온수 보일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편 자동차의 엔진 공회전에 의한 저주파 진동은 일반적인 가정용 전기 제품과 달라서 명확한 피해를,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대체로 소음이나 진동의 영향에는 개인차가 당연히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성인보다는 노인이나 어린이, 젊은 남성보다도 여성, 특히 중년 여성, 건강한 사람보다는 환자에게 그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힘이 센 젊은이나 장년이 자기의 감수성을 기준으로 제멋대로 판단을 할 때 그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가교에 의한 저주파 진동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것이 가져다 주는 피해는 보다 복합적이고 각각의 정도도 심하고, 실로 대단한 고통을 도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준다. 그러나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에 의해서 가족이 해체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로 저주파음(소음)이 가져 오는 피해일 뿐만 아니라, 본래의 소음이 가져다주는 피해이기도 하다. 고가교 주변에 사는 주민의 증언을 소개한다.

 

가족의 단란함에 대해서 보면 오늘은 누가 기분이 나쁘고 안절부절하고 있는가, 서로 안색을 살피고 식사도 따로따로 서로 대화하는 일도 없다.

 

가족 간에 마음편히 이야기하는 것도 없어졌다. 대화를 하고 있어도 소음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가

족 모두가 신경질적이 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말도 안하게 되었다. 텔레비젼 화면도 잘 안나오고 소리도 잘 안들려서 볼륨을 올리기 때문에 더더욱 가족간의 대화가 어려워진다.

 

이같은 지적은 두통, 답답함, 불면 등과 마찬가지로 고속도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증언에 몇번이고 등장한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요즈음 예전에 가족이 갖고 있었던 다양한 기능이 외부화, 사회화되면서 가족의 기능이 어린이의 <사회화>나 성인들의 심리 안정화라는 극히 제한된 몇 가지 기능에 한정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들끼리의 단란함이나 대화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은 가족이 가진 이 최후의 기능마저 빼앗기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을 경우 가정은 있어도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비극적인 상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오늘의 가족은 흔히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불리운다. 사람은 모두 살아가면서 괴롭거나 슬픈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은 그런 감정을 받아주고 응어리를 풀어서 발산할 수 있는 편안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최후의 공동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이 붕괴의 위기에 처해진다면 벌거벗은 인간이 공적인 사회가 가져오는 험하고 쓸쓸한 삶의 체험에 직접 대치할 수밖에 없을 사태를 맞게 되지만, 이러한 사태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한 체험인가는 감히 말할 수도 없다. 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속 고가도로 주변에서는 집안에 흙발로 침입하는 고압의 저주파음에 의해서 가족이 실제로 붕괴의 위기에 처해져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마음 편히 쉴수 있는 내 집에서 편하게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괴롭다.>

 

<내 경우에는 가능한 신경을 안쓰려고 하고 있다. 신경을 좀 쓰면 집은 지옥이 되어 버린다.>

 

저주파 진동, 곧 자동차는 이런 복합적인 피해를 주변 주민에게 가져다 준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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