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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는 민중의 말이라야 한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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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는 민중의 말이라야 한다

이 상 태(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국어교육의 길잡이에서)

 

 

국어교육이란 말은 국어를 가르친다는 말인데, 이 때 그 목적어가 되는 국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국어교육을 짜는 입장이나, 그것을 행하는 입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바탕은 무엇을가르치느냐가 될 것이다. 즉 국어라는 것을 어떻게 보고 그것을 어느 정도로 넓게 터잡느냐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국어라는 말이 한 개의 뜻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국어교육을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풀어보면 국어를 배운다는 일인데 이 때 배우는 것이 국어다. 즉 학생이 배우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은 국어인 것이다. 학생들은 국어시간에 낱말도 배우고 말본도 배우고, 시도, 소설도, 수필도 배우지마는 결국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국어이다. 따라서 이 때 배우는 속살인 국어의 내용이 잘못 잡히면 그가 배운 모든 것은 잘못 배우는 것이 되고 만다.

 

학생이 국어과에서 배워야 되는 속살의 바탕이 국어란 말은 다시 말하면 배달말의 얼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겨레는 유사 이래로 많은 외국과 서로 물질적·정신적 교섭을 대량으로 하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외국어를 교육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 겨레는 거의 모두 우리의 삶의 가장 귀중한 때인 청년기 가운데서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며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 나라는 국력을 기울여 외국어를 그가 지닌 강력한 교육의 힘을 동원하여 교육하고 있다. 우리의 과거 역사에서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던 때가 없었지마는, 오늘날처럼 대량으로 조직적으로 큰 힘을 기울여 남의 말을 배운 적은 일찍이 없었고,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갔을 때에도 오늘날보다 오히려 이런 현상은 덜했다.

 

이러매, 국어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에게 확고한 국어의식(배달말의 얼)을 심어주는 일이다. 외국어 교육도 제나라 말의 확고한 틀 위에서만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외국어를 가르치는 이들이 국어의 바탕이 없어서 이를 바로 배우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 형편에까지 오게 되었다.

 

국어 순화를 해야 한다고 외치게 되는 가장 깊은 단 하나의 이유는 이전의 우리 교육에서 배달말의 얼, 또는 국어의 바탕을 철저하게 심어 주지 않은 데 있다. 현재의 우리의 제도 문화를 수입하고, 형성하게 되는데 공을 끼친 분들이 만약 배달말의 얼이나 국어의 바탕에 착실했던들 지금 우리가 다시 국어순화를 부르짖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서 배울 단 하나의 사실은 이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도록 말그대로 국어를 잘 가르치는 일이며, 이때 그 기초는 국어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우리가 외래사조나 문화를 수입하고, 그것을 우리 겨레의 체질로 소화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가멸케 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욱 크게 될 것인데, 이때 남의 문화의 소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겨레의 한두 사람이나 일부 계층이 남의 말을 잘하게 되어 그 문화를 소화하였다고 할 수 없다.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소화한다는 것은 겨레 전체의 삶 속에 그 문화바탕을 녹아들게 하는 것이다.

 

말이 문화의 결정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한 겨레가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길은 두 가지 길 뿐이다. 즉 재 겨레가 전체적으로 목표가 되는 문화를 표현한 말을 배우는 길과 거꾸로 그 문화바탕을 내 겨레의 말로 녹이고 풀어서 내 겨레의 이전의 말 바탕에 녹이고 스미게 하는 길이 그것인 바, 초등학교에서도 한자를 가르치고 초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자는 발상이 앞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두가지 길 가운데서 어느 것이 바람직하고 타당한 것인가? 겨레의 가장 본질적 지표가 그 피나 지연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말에 있음(이규호; 말의 힘)을 감안하면 앞의 길은 겨레를 없이하고 자멸하려는 길 밖에는 되지 않는다. 우리 겨레를 없이하려고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편 정책 가운데서 가장 악랄한 정책이 배달말 말살정책이었고, 이때 우리가 모두 아픈 시련을 겪어 이를 견디고 이긴 것이 한 세대 전의 일인데 또다시 이런 일을 스스로 맞아서 펴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한다. 이 길은 남의 문화를 받아들여 내 겨레를 살찌우고 내 겨레 장래의 번영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이와는 거꾸로 내 겨레 자멸의 수렁으로 내가 뛰어드는 길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배달말의 얼(국어의식)을 바로 세우고, 이 바탕 위에서 남의 말의 문화를 내가 가진 말로 풀고 녹여서 겨레 전체에게 펼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어 교육이 중요시되면 될수록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어교육이고, 이 두 가지의 말 교육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국어의 바탕에서만 남의 말도 바로 배울 수 있고, 남의 문화도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다.

 

오늘의 학생은 내일의 우리 문화를 창조할 역군들이다. 이들에게 국어의식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남의 나라와 교섭하면서, 또는 받아들이고 창조함에 있어서 이 언어 제국주의 시대에 그들이 만들 것은 결국 국어를 어지르고 겨레를 없애는 일밖에는 더할 것이 없게 되고, 따라서 문화는 언어제국주의에 밀려 저절로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 국어는 어질러졌고, 그 글자마저 통일되지 않은 것이 어제의 잘못에서 기인된 것이지마는 문제는 어제나 오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일의 국어, 내일의 겨레의 생존과 멸망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국어란 무엇인가

 

1. 국어는 이라야 한다.

위에서 말의 형식적 구실을 살피는 마당에서 배달말은 배달말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배달말됨을 찾고 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말은 객관적으로 존재(배달말임)가 아니고 상호 주관적(inter-subjective)인 것이다. 배달말이라는 것은 배달겨레라는 동아리(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들의 삶에 불편을 느끼지 않게 쓰는 말이라야 하는데, 이때 말을 구성하는 낱말의 수나 말본조직은 상당히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기록하는 글자도 두 가지가 있다. 우리 겨레의 어느 한두 사람만 쓰는 글이나, 어떤 계층만 쓰는 말은 배달말이 될 수가 없다.

 

말이란 상호 주관적이어서 나비나 매미를 연구하기 위해 그 대상을 채집하듯이 자연적으로 객관적으로 그 대상이 주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배달말 에 의의가 있지 아니하고 그 으로서 본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국어를 뜻매길 때에 국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객관물을 찾는 일이 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 대상물인 국어가 이미 존재하고 뒤이어 국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국어라는 의식이 있고 나서 국어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특히 교육의 측면으로 볼 때에는 국어의식이 분명할수록 국어가 분명하고, 국어의식이 순수하고 통일되어 있는 곳에만 국어가 순수해지고 통일되게 된다는 말이다. 국어 교육을 말하는 자리에서 국어와 국어 의식간의 관계를 바로 보지 못하면 전체를 그르치는 기틀을 마련할 뿐, 아무런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말을 연구하는 언어학이 그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말을 객관적인 대상물로 다루었음을 우리는 잘 기억한다. 그러나 이것은 곧이곧대로 국어교육에 적용될 수 없다. 말을 객관적인 대상물로 파악한 것은 그들이 그때의 학문적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약정적 성격의 뜻매김임을 잊으면 안된다. 말과 인간과의 본질적이고도 다양한 관계를 한꺼번에 파악할 수도 없고, 그리 할 필요도 없는 구조주의언어학자들은 그런 다양한 관계의 총화를 보지 못하고 그 일부인 소리를 중심으로 이를 객관적으로 다루겠다는 태도나 연구범위의 한정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말의 전체 모습에 대한 필요·충분한 말의 뜻매김이 결코 될 수 없다. 말을 그렇게 약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국어 모습이 오로지 그러하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게 대상을 살핀 둘째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 마당에서 필요한 것은 언어학자용이 아니요 보통 교육을 위한 것이고, 일반언어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닌 배달의 겨레가 쓰는 우리말을 뜻매겨야 하기 때문이다.

 

말을 객관적 대상물로 보고서는 국어를 순화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겨레가 쓰는 모든 말은 국어이며, 거기서 가리고 뽑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객관적 대상물이 아니고 얼이다. 그리고 얼이어야 한다.

 

2. 국어는 가능성이라야 한다.

말을 보는 두 가지 입장을 앞에서 살폈다. 즉 이미 해 버린 말과 가능성으로서의 말이 그것이다. 세계의 모든 말이 그러하듯이 우리말도 어떤 한계 숫자가 없다. 우리말이 가능한 월(문장)의 수나, 한 월의 낱말수는 무한하다. 이것은 말이 무한함을 보이는 것이다. 말이란 무한한 가능성 그 자체이고 이미 해 버린 말이란 그 가능성의 나타난 일부의 것이다. 그런데 말을 객관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말의 무한성과 가능성을 모르던 시대의 산물이다. 해버린 말은 드러난 실체로서, 그 깊이는 가능성 자체로서의 말이 숨은 바탕이 되어 있고 우리말로 이라는 말은 이 둘을 포함하여 이르고 있다. 이때 앞의 것만으로 말을 파악하면 죽은 말이 되어 가능성이 죽어 버리고 만다. 가능성으로서의 말은 일찍부터 서양에서 중요시되었거니와 이것이 근대 언어학자에서도 인식되기에 이르러 지금은 아무도 객관적 대상물로 보지 않는다.

 

말이 사고나 문화와 상호 관련함을 감안하면, 말의 이 가능성은 겨레의 문화, 겨레의 얼의 열린 가능성을 기약해 주고, 그 고유, 독자스런 모습이 한없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의 교육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교육이란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활동이다. 닫혀버린 지식을 습득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인 일이 아니고, 교육은 그 개인이나 사회의 내일의 열림을 위해서 하는 활동인 바 이때에도 닫힌 말보기보다는 열린 말보기로 가르쳐야 그 소임을 바로 해 낼 수 있다.

 

3. 국어는 배달겨레의 얼이어야 한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마는 이들 개개인 가운데서 말에 대해 엄정 중립인 자는 하나도 없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어떤 개별의 말과 뗄 수 없이 한 덩어리로(운명적으로) 맺어져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제 어머니의 젖줄을 물고 큰다면, 정신적으로는 제 겨레의 말을 굴리고 살게 되는 것이 본질적이고 운명적인 일이다. 인간이 말을 배우는 것은 누가 의도적으로 가르쳐서 되는 것은 아니라, 저절로 제나라 말을 스스로 배운다. 우리는 국어라고 하는 배달말은 이렇게 하여 가지게 된 나됨, 우리됨의 징표이다. 문화·인류학에서도 겨레를 분별하는 가장 확실한 자료가 말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제 토박이말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자세히 살피겠거니와 이것은 아직 그 전체적 모습의 자세한 모든 부분이 밝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어려서 토박이말을 알게 되는 과정은 그가 커서 남의 말을 배우는 과정과 같지 아니하다는 점이며, 앞 것을 배우는 것은 인간의 내재적이고 타고난 능력의 나타남이라고 보여진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이 능력은 제 나라말을 다 배우고 나면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보편적 능력은 늦어도 사춘기 이전에 소멸되는 것으로서, 10세 이전에 노출된 말은 저절로 알게 되는 능력이다. 이런 점을 보면 배달겨레가 배달말을 아는 것은 하느님이 주는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우리 겨레라는 것은 그것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젖줄을 물고 저절로 알게 된 말이 겨레말이기 때문에 배달말을 쓰고, 배달말을 쓰는 때문에 배달겨레가 된 것이다.

 

4. 국어는 민중의 말이라야 한다.

두어 세대 전부터 표준말을 정하는 기준을 마련해 놓고, 그 속에 중류사회(지금은 교양있는 사람으로 바뀜)’란 기준을 넣어서 국어를 정하는 잣대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이 잣대가 그대로 쓰이고 있는지도 문제이지마는 우선 우리 겨레를 상류, 중류, 하류로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되고, 부질없는 일이다. 우리 나라는 국체가 민중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민중의 나라이다. 따라서 표준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민중의 말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어이다.

 

우리 겨레가 살아온 역사 동안 한 번도 민중의 삶이 끌어 올려지지 못한 것은 교육의 본질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확인시키는 일이요, 자기를 밝히는 일이며, 자기가 주인이 되도록 도우는 일이며, 이미 자기에게 내재하는 가능성을 더욱 기르고 키우는 일이다. 배우는 이에게 전혀 없는 어떤 성질이나 능력도 남이 주사를 놓듯이 심어 넣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이제까지 교육을 연구한 분들이 밝힌 성과이다.

 

교육의 대상이 전체 겨레, 민중일 때 자기됨을 확인시키고, 밝히고 주인됨을 깨우치는 데 대한 여러 가지 길 가운데서 가장 근본되는 길은 그들의 말을 찾아서 그들이 쓰는 말을 확인시키고, 말을 밝히고, 그들의 말로 겨레말을 삼는 길이다. 겨레말의 밭은 민중이며, 민중이라는 밭에 심겨진 그들의 말에 거름을 주고, 그 열매를 충실히 하기 위해 소담스런 꽃을 피게 하고, 거름을 주는 일이 작게는 민중이 제 가락으로 구김없이 제 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요, 민중들로 하여금 너나 없이 모두 창조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요, 겨레 문화가 한 덩어리로 꽃피게 하는 길이며, 모든 민중의 활발한 창의성은 드디어 나라의 발전, 겨레의 융성을 가져오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지금 쓰이고 있는 우리말을 그 낱말의 계층에서 살펴보면 거의 한자말과 배달말과 인도·유럽말과 일본말 등의 여러 기원의 낱말들이 다양한 단층을 보이고 있다.

 

뽕 밭- 桑田 젓 소- 乳牛 벼농사- 水稻作

밑거름- 基肥 잎마름- 葉枯 흙넣기- 土入

흙덮기- 覆土 논밟기- 畓壓 벼팬후- 出橞後

쌀보리- 裸麥 쌀농사- 米作 모내기- 移秧

풋먹이- 錄飼料 밭농사- 田作 진 논- 濕畓

 

어떤 한 개념에 대해 배달말, 한자말, 일본말, 인도, 유럽말 등으로 네맡말씩 있다면 그 자체로서 불필요하게 말 수가 네 배로 불어나서 기억에 크게 부담을 줄 뿐아니라, 효과적인 전달을 크게 방해하여 좋은 말이라 할 수 없는 나쁜 독소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 표기할 글자가 한자나 알파베트라야 하니 해독은 점점 가중된다. 이런 점은 모두 뒤에서 다시 보겠거니와 여기서는 이런 현상에 대한 다른 면에서의 고찰을 살펴보자.

 

위의 예에서 한자로 쓰여진 말들은 대학의 교재, 연구 논문집에 쓰이는 말이고, 한글로 쓰여진 것은 그에 대한 민중(농민)의 말이다. 한 나라 한 겨레로서 문화라는 것은 전체 겨레의 저력이요, 겨레 전체의 사고의 결과일진대, 학문을 연구하는 이는 민중의 뿌리를 가지지 않은 학문을 하고, 그 겨레의 학자가 연구한 학문적 결과가 민중에게 파급된 수 없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이러매 참된 겨레 문화를 창조할 수 있을까?

 

과거나 현재의 배달겨레에게 있어서 문화라는 현상은 민중적 뿌리를 가지지 않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서 고유하면서 고도의 정신문화를 찾기 어려운 이유도 겉으로 드러난 정신 문화 일반이 민중적 뿌리를 가지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우리는 여러 천년의 역사 동안 애써 살아왔고, 그 동안 여러 외국으로부터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지마는 왜 이들에 대한 민중적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즉 문화를 이끌고 가는 이들이 민중을 져버렸기 때문이다. 문화를 이끌고 가는 이들이 민중을 져버렸다는 것은 이들이 민중의 말로 자기들의 사상 세계와 자기들의 느낌을 풀어내지 못했음을 말한다.

 

수많은 고승 대덕이 있어 왔지마는 민중의 삶은 무속적인 경지를 헤어나지 못했고, 주희와 공구에 버금가는 유학자를 배출한 나라에서 백성의 삶이 이들의 혜택을 입지 못한 이유는 이들이 자기네 사상을 남의 말로만 연구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행히도 남의 말을 아는 자기네들은 그 말 때문에 자기가 공구를 닮고 주희를 닮고, 석가를 닮은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몰라도, 필경은 그들 자신의 업적은 아직도 겨레의 삶에 뿌리를 못내린 채 문집이니 경론속에 묻혀 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신채호는 우리 조선 사람은 이해 이전에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고,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어도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현상을 잘 지적했다. 한 겨레 안에서 문화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민중의 뿌리가 내린 문화가 창조적으로 생성되지 못했음은 말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뿌리찾기로 볼 수 있는 주체성 찾기’ ‘고유의 얼 찾기로 우리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들이 바로 고전을 배달말(민중의 말)로 뒤치는 일이거나 옛 문집을 배달말로 풀어내는 일임으로도 알 수 있다. 민중의 말에까지 내려가서 민중을 이끌고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나 표준말을 현재처럼 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민중을 믿지 않는 태도이다. 민중은 어리석고, 천하고, 한 등급 낮은 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고상한수준으로(즉 끄는 이가 있는 위치로)올리려 하고, 민중의 말, 겨레의 말은 미개한 말이므로 한자와 한문을 가르치지 않고는 이 말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겨레의 삶을 뒤돌아 보면, 선각자나 선구자로서 민중 속으로 내려가서 이들과 한 덩어리가 된 뒤에 함께 다시 올라오는 이가 매우 드물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선 자리를 벗고 내려가서 다시 올라오는태도가 없이 어찌 선각자요 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 너희들은 등급이 낮고 너희들은 어리석고 천하니 내 선 자리로 올라오라는 태도가 표준말을 정하려는 태도요, 한자(남의 글자)를 가르치는 태도이다.

 

표준말이란 당치 않다. 겨레의 말을 순수하게, 막히지 않게(통일되게) 하려면 차라리 민중말을 정하고 찾아야 한다. 그리고 민중말은 서울, 중류, 현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어디에서나 겨레가 그 역사 동안 써 온 고유의 말이면 계급이나 시대나 지역을 불문하고 찾아내서 이를 밝혀야 한다. 이것이 국어이다.

 

5. 국어는 한글로 나타낼 수 없으면 안된다.

글자는 말을 보조하는 수단이다. 말은 소리라는 형식과 말뜻이라는 내용이 겉과 속을 나눌 수 없는 하나이며, 글자는 말의 계층적 깊이를 파악한 정도에 따라 발전해 왔다. 말은 무엇보다도 말뜻을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하여 있다. 따라서 글자를 사람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되짚어 볼 때 뜻글자가 먼저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문화적 발달사로 볼 때 뜻글자가 소리글자에 앞서서 나타난 것은 말의 본질이 뜻을 전하려 한데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건망증이 심한 주인이 머슴의 성씨가 배씨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동그라미를 그렸다면 그것도 하나의 글자이며, 방물장수가 물건 판 집의 감나무에 막대기 둘을 그려 20전어치를 외상으로 팔았음을 표시했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글자다. 위의 두 예에서 보듯이 말이 가진 시간·공간적 제약에서 풀고자하여 글자를 만듦에 있어서 뜻글자를 만든다면, 이는 몇 가지 제약을 가진다. 그 첫째가 뜻의 번짐에 글자의 수가 따르지 못한다는 점이지마는 상식이고, 더욱 중대한 뜻글자의 특성은 그것이 가지는 인공적 자의적인 면이다.

 

건망증이 심한 주인은 자기가 그린 동그라미 글자를 보고 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외상값을 받을 방물장수는 두 금을 보고 2전이나 2원으로 값을 읽을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승인을 받지 않은, 따라서 글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승인을 얻었다고 하는 한자도 그 소리는 천차만별로 다를 수가 있다. ‘의 소리가 시대별로, 지역별로 어떻게 다른 소리가 나는지 조사해 보면 알 것이다. 이것은 글자가 말을 돕는 수단이라는 으뜸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고, 따라서 뜻글자를 쓰는 말은 말소리의 변천이 훨씬 빠른 것이다.

 

이 글자는 또 민중과 글자를 떼어 놓는다. 이 글자를 읽기 위해서는 다음 (1)의 과정을 익혀야 한다.(만약 5000개의 말수를 쓴다면).

 

(1)글자의 소리 읽기

글자의 뜻 읽기

(1) ㈎㈏5000번 연습

 

이런 글자로 새 개념을 쓰려면 다음 (2)의 과정을 익혀야 된다.

 

(2)개념의 소리를 확정시키는 작업

개념의 글자 꼴을 확정시키는 작업

전체 겨레에게 세대마다 영원히 (2가나) 또는 (1가나)를 알리는 작업

 

위의 (1)(2)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뜻글자를 쓸 때에는 그것을 번지게 하기 위해 매우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리글자인 경우 (1)이나 (2)에서 각각 만이 필요하고 이것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뜻글자가 비합리적인가를 알 수 있다.

 

뜻글자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 장점이야말로 치명적인 단점을 만든다. 각 지역마다 방언의 차이는 너무 크고, 사회가 폐쇄적이며,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엄격하게 분리되고, 또 이어온 문화의 전승만이 중요한 경우에는 (‘선왕의 일을 살피고 삼대가 가장 이상적인 시대라 하면서 과거만이 중요시되는 경우) 글자를 소리에 묶을 수는 없고, 이런 이유로 쓰게 된 뜻글자는 또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중요하다. 뜻글자는 쓰는 겨레가 내일을 지향하는 창조적 문화를 민중적 뿌리를 가지고 생성하려면 (2)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때 (1)(2)는 막대한 민중적 에너지를 소모케 한다. 역대 중국은 왕조가 새로 열릴 때마다 그 기본 작업의 하나가 표준 발음법 정하기였고 이것이 반이나마 성공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회든지 뜻글자를 버리고 소리글자로 옮기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즉 문화 발전에 민중의 참여가 필요하고, 민중이 문화의 뿌리를 함께 가지게 되며, 정치나 문화가 널리 펴져서 말에서 방언의 차이가 크지 않을 때 소리글자가 가능한데, 이것은 거꾸로 볼 수도 있다.

 

한글로 적어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만이 국어로 될 수 있다고 함은 한글이 국어에 대한 거의 완벽한 소리글자이며, 말의 형식은 소리이고, 말소리가 말이 나타내는 밖으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글자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입말로 자기의 뜻을 전한다. 입말로 전했을 때 의사 전달에 장애가 오는 것은 좋은 말(배달말)이 아니다. 따라서, 국어란 한글로 적었을 때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6. 국어는 순수성과 통일성을 지향한다.

국어가 통일됨을 지향하는 것은 말일 사회를 묶는 구실에서 바로 이끌려 나오는 것으로서 사회가 하나됨을 지향하는 이상 그 길이 여러 가락으로 가닥지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국어가 통일된다는 것은 바로 국어가 순수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순수성과 통일성은 두 가지가 아닌 하나의 다른 모습이다.

 

말을 객관적 대상물처럼 보아서 말을 연구하는 데서나 말을 가르치는 데서 잘못 이용함으로써 일을 크게 그르친 일이 있기로 국어의 뜻넓이를 베푸는 마당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해 두고자 한다. 말을 객관적 대상물로 보면 겨레가 제 나라말을 쓰든지, 남의 나라말을 쓰든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다.

 

한 겨레의 토박이말을 국어라고 할 때 그 겨레에게는 토박이말과 남의 말이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겨레는 의도적인 교육을 했건 말건에 관계없이 모두 자유롭게 우리말을 제뜻에 맞추어 쓸 줄 안다. 초등학교의 문앞에도 가보지 않는 이도 자기가 할 말은 우리말의 말본 규정에 꼭 맞게 할 줄도 알며, 남이 하는 말도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말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그는 시인이고 평론가이거나 소설가이고 교수는 아니다.’라는 말이 ‘(시인이고 평론가)이거나 (소설가이고 교수 아님)’의 뜻과 ‘(시인이고 평론가)이거나 (소설가이고 교수)가 아님의 두 가지일 수 있음을 잘 이해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학교 말본의 도움 없이도 토박이말(국어; 배달말)을 잘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말인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10년 이상을 남의 말 배우는데 온 정성을 다 바치지마는 남의 말에 대한 능력은 제나라 말만큼 능숙하게 될 수 없다.

 

남의 말과 견주어서 생기는 토박이말의 이런 점은 토박이말은 그 겨레에게 타고난것으로밖에 볼 수 없도록 만든다. 그 겨레의 타고난 능력이요, 그 겨레와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로서 국어가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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