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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주는 것이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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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주는 것이다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 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 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모호하고 복잡한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생각은,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과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저장하려는 지향의 단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런 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의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 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 당하는 것이다. 성격의 주요 경향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 존재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규범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 박 탈당하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준다는 것은 잠재성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나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희열로 가득 채워 준다. 나는 자신을, 충만 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왜냐하면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생동감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어머니는 자기 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자신을 내어 주며 유아에게 젖을 먹이고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주는 것은 부유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자이다. 어떤 것을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가 얼마나 많이 가졌든 지간에 가난한 사람이며, 가난해진 사람이다.

 

누구든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다. 그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필수품마저도 상실한 사람만이 물질적인 것을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사람이 최소한의 필수품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것보다는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기꺼이 주려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가난은 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 가난이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서 주는 기쁨을 빼앗기 때문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과 그가 지닌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준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지식, 자신의 유머, 슬픔을 준다. 이것들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의 표현이며 명시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부유하게 하며, 자신의 생동감을 강화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강화한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그는 타인의 삶에 무엇인가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가져온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진실로 주게 될 때 그는 그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는 것은 타인을 역시 주는 사람으로 만들게 되며,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가져온 것을 함께 즐기게 된다. 주는 행위 속에서 무엇인가 탄생하며 관계된 두 사람은 새로 태어난 생명에 감사하게 된다. 특히 이를 사랑과 관련지어 보면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즉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히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써만, 신뢰를 신뢰로써만 바꾸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타인에 대해 진실로 자극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진실 되고 개인적인 삶의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사랑을 한다면, 즉 사랑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배울 수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 자극 받으며, 정신 분석가는 그의 환자에 의해 치료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서로가 진실하고 생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하는 능력은 개인의 성격 발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성격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발달되어 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 속에서 개인은 의존성, 자아 도취적 전능, 타인을 착취하고픈 욕망, 축적하고싶은 욕구를 극복해 왔으며,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 즉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는 용기를 획득해 왔다. 이러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인간도 자신 을 주는 것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준다는 요소 이외에도 사랑의 적극적인 성격은, 사랑이 모든 형태의 사랑에 공통되는 기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보살핌과 책임, 존경과 지식이다. 사랑이 보살핌을 포함한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다난다. 만약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목욕시키고 먹이고 신체적인 안락을 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을 본다면, 아무도 그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어머니가 자식을 소중히 보살피는 것을 본다면, 그 어머니의 사랑에 감명을 받게 된다. 그것은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만일 한 여자가 자기는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였는데,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고 있다면, 우리는 그 여자 가 꽃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존재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부족한 곳에는 사랑도 없다. 사랑의 이 요소는 성경의 요나서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곳 사람들이 그들의 악습을 고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라고 말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후회하고 하느님이 그들을 용서하지나 않을까 하여 자기의 임무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는 명령과 율법에 대해서는 강렬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사랑과 단결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고립과 폐쇄의 상태를 상징하는 고래 뱃속에 갇히게 된다. 하느님은 그를 용서하고, 요 나는 니느웨로 향한다.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가르쳐 준 대로 설법하는데, 그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습관을 바꾸어, 마침내 하느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요나는 몹시 화가 나고 실망한다. 요나는 자비가 아니라 '정의'가 행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침내 요나는 하느님이 그를 위해 햇빛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자라게 해 놓은 나무 그늘 아래서 위안을 느낀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 나무를 시들게 하자, 요나는 상심하여 하느님에 대해 불평을 하게 된다. 하느님이 대답한다."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워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12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에 대한하느님의 대답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자라게 하는 것'이고, 사랑과 노동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해준다. 인간은 자기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며,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한다. 보살핌과 관심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 즉 책임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 책임은 흔히 의무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위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그것이 표현되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 할 수 있고,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카인처럼 "내가 내 동생의 보호자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 답한다.형제의 삶은 형제의 일일뿐 아니라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처럼 동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어머니와 아기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책임은 주로 신체적인 욕구에 대한 보살핌을 말한다. 성인들 사이의 사랑에 있어서 책임은 상대방의 심리적 욕구와 관련된다.

책임은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쉽게 지배와 소유로 전락할 수 있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이란 어원(respicere=바라보다)과 관련지어볼 때,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 그의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며, 착취가 없는 상태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성장하기를 바라며 자신을 위해서, 나에게 봉사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서 필요로 하는 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 체감을 느낄 것이다. 존경은 내가 독립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즉 내가 꼿꼿이 서서 목발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 가사에서 나타나듯이 사랑은 자유의 자식이지 지배의 자식이 결코 아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보살핌과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면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유발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지식에도 많은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이 되는 지식은, 주변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을 꿰뚫는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은 내가 나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더라도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를 알 수도 있다. 그때, 나는 그가 불안해하고 있고 근심에 싸여 있으며, 고독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의 분노가 더 깊은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안해하고 당황하는 사람으로서, 즉 성난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지식은 사랑의 문제에 대해 또 하나의,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고립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과 융합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는 또 다른, 특별히 인간적인 욕망, '인간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측면에서 볼 때는 하나의 기적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그 자신과 그의 동료에게 있어서 풀지 못할 비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동료를 알지만, 그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나 우리의 동료 모두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가우리 존재의 내면으로, 타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식의 목표는 더욱더 멀어지기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 영혼의 비밀을 향해, '인간'이라는 내면의 핵을 향해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필사적인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힘, 즉 그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며, 그리고 그를 사물로, 우리의 것으로, 우리의 소유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시도의 궁극적인 단계는 극단적인 가학성 음란증, 즉 인간을 괴롭히고 고문하여 고통 속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도록 강요하는 욕망과 능력이다. 이렇듯 인간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갈망 속에는 깊고도 강렬한 잔인성과 파괴욕이라는 기본적인 동기가 내재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작 바벨에 의하여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러시아 내란 때 자신의 전 주인에게 죽음의 낙인을 찍은 동료사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총살로써는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총살로써는 당신은 그 녀석을 처치해 버릴 뿐이다 .......총살로써는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드러나는 지도 모르는 그 사람의 영혼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수차 한 시간 이상 적을 짓밟은 적이 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생명이 진정 무엇인지, 생명이 어떻게 우리의 방식에 따라 소멸되어 가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어린이들에게서 우리는 지식으로 가는 이 길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어린이는 어떤 물건에 대해 알기 위해 그것을 분해하거나 부수어 버린다. 혹은 동물을 해부하기도 하며, 나비의 날개를 잔인하게 떼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잔인성은 더 깊은 어떤 것, 즉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희망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다른 길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 그것을 통해 알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일치에 의해 충족된다. 융합의 행위 속에서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며 모든 사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가 제공할 수 있는 어떤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일치의 경험을 통해서만, 나는 인간에 대해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가학성 음란증은 그 비밀을 알고 자 하는 동기에 의해 유발되지만,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무지한 채로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지만, 내가 행한 것이라곤 그를 파괴한 것뿐이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며, 일치의 행위 속에서 사랑은 내 질문에 대답한다. 사랑하고 내 자신을 내주며, 다른 사람에게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찾고, 나를 발견하며, 우리 두 사람을 찾아내고,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 동료를 알고자 하는 바람은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심리학의 주요 원천이다. 하지만 이 욕망이 인간의 모든 것, 즉 내 면의 비밀을 알려는 것이라면, 그 욕망은 사고에 의한 지식 따위의 흔한 종류의 지식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천배나 더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 바닥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듯, 우리도 우리자신에게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며, 언어를 초월한다. 그것은 일치의 경험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를 통한 지식, 즉 심리학적인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이르는 필요 조건이 된다. 다른 사람의 현실을 보기 위해서,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이나 비이성적으로 왜곡된 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와 나 자신 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오직 내가 인간 존재를 객관적으로 알아야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안다는 문제는 신을 안다는 종교적인 문제와 병행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 신학에서는 사고에 의해서 신을 알고 신에 대해 진술하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이 신학은 사고에 의해서 신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유일신 사상의 결과인 신비주의에서는 사고에 의해 신을 알려는 시도를 포기한다. 그 대신 신에 대한 지식을 구할 여지가 없는 신과의 일치를 경험하고자 한다.

 

인간과의 일치, 종교적으로는 신과의 일치를 경험하는 것은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엘버트 슈바이처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합리주의의 결과이며 그리고 가장 과감하고 근본적인 결과이다. 그 경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우리 지식의 한계에 근거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결코 '파악'하지 못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이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논리적 결과가 신비주의인 것처럼 심리학의 궁극적 귀결은 사랑이다.

 

보살핌과 책임, 존경,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 네 가지는 성숙한 인간, 즉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계발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갖고자 하며, 전지 전능이라는 자아 도취적 망상을 포기하고, 오직 진실로 생산적인 활동만이 제공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획득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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