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by 처사21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김 용 호(계간 <대화> 편집주간 / 한겨레신문 1996.5.26)
"배로 생각하지."
아프리카의 어떤 추장이 `무엇으로 생각하시냐'는 한 서구 기자의 질문에 대해 내놓은 답변이다. 아마 그 기자는 웃었을지 모른다. `정신' 하면 머리고, `육체'하면 몸뚱이 아닌가. 게다가 배는 `더러운 육체'를 연상케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요가나 단전호흡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추장의 얘기가 옳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기공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온몸으로 생각하지'라고 답변할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동조나 하듯, 머리로만 생각하던 사람들이 요즘 들어 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40대 초의 대학교수가, 그것도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가 권투경기에 출전한 사건은 그 자체로 `머리에서 몸으로'란 슬로건이었다. 권투는 근육 운동의 가장 강력한, 그것도 야만스러워 보이는 표현이다. 책이나 강의로 근엄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마땅할' 대학교수가 주먹질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내적 충동, 거기에 비밀이 담겨있다.
최근의 옷패션은 그러한 충동을 대중적으로 드러낸다. 젊은 여성들이 알몸을 노출하고 착 붙는 옷으로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다. `나는 몸으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정신 사유'에 대비되는 `몸 사유'다. 2차대전 전만 해도 여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펑퍼짐한 옷테두리를 통해 자신이 촉감적 존재라는 사실을 숨겼다. 그 때 `사랑은 순수 정신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퍼졌다.
새로운 패션은 몸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촉감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길 거리라는 공개된 장소에 알룩달룩하게 드러난 몸들이 촉감의 문화, 만짐의 표현, 몸의 정신을 퍼뜨린다. 유니폼을 강요한 기업들도 최근에는 일부 창의적인 부서부터 자유 복장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정부 관료들조차 자유 복장을 추진할 기세다. 그것은 몸에 무엇을 걸쳤느냐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철학이다. 창의성은 자유 복장의 촉감을 타고 온몸에서 진동한다는 가정이다.
산업은 이러한 경향을 놓치지 않는다. 미국 영화배우나 한국 가수의 몸을 내 안에 실현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성형외과나 캐릭터 산업, 패션 산업이 크게 유행하고, 찜질방, 안마 이발소, 여관, 룸살롱, 수면텔 등은 몸끼리의 접촉이나 몸과 물의 접촉, 몸 사유의 스트레스 해소를 상품화한다. 이발소나 미용소에서는 마치 원숭이들처럼 털손질을 통해 몸사고를 부드럽게 해 준다.
온몸으로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인터랙터 쿠션'이라는 기계도 개발됐다. 음악의 진동에 따라 몸도 흔들리게 하는 음악―몸 시스템이다. 스포츠 신문이나 연예, 오락 잡지들은 근육과 몸매, 몸동작을 판다.
몸의 의식은 환경 문제 때문에 더욱 예민해졌다. 대도시에서 살다가 시골에 가 본 사람이라면 초저녁 별빛에 맑은 바람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생태학은 인간이 몸의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다. 서구 사회에서 이는 탈대도시 물결은 몸의 생기를 되찾으려는 현대판 민족 대이동이다.
불교에서는 다섯 감각도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촉각을 `몸의 의식(身識 )'이라고 불렀다. 서구 근대문명은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고, 육체에는 정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몸에서 의식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은 결국 평면적이고 단선적인 머리 지식의 한계를 넘으려는 지구적 의지이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위기를 낳고 있다. 몸이 사고의 중요한 수단이 되면서 머리 사유에 기초했던 사회제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몸 사유는 머리의 논리적 사유에 비해 훨씬 직접적이고 `순간의 절대성'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촉감을 `나'로 동일시하면서 독특한 감각과 분위기에서 개성을 찾으려 한다. 촉감이나 분위기가 안 맞으면 쉽게 이혼하고, 직장도 쉽게 벗어던 진다. 피부에 와닿지 않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이념에는 신경도 안 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도약하려는 것이다.
교육 혁명, 유통 혁명, 기업의 리스트럭처링, 국가 관료주의의 위기가 몸의 의식이 예민해지면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하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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