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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미술의 세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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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미술의 세계

김원룡



고미술의 이해

최근에 와서 우리 나라 고미술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흥미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우리들로서는 민족 의식의 고조와 전통에 대한 재인식에 그 주원인이 있을 것이고, 외국인으로서는 동양 미술에서의 한국 미술의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미술품이 지닌 독특하고 개성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된 데 그 원인이 있는 듯하다. 우리 자신들은 우리 고미술에 대해서 일종의 신앙심과 같은 숭배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미(美)의 가치나 본질을 따지기 전에 우선 감탄사부터 연발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다. '고슴도치 자기 아들 머리 함함하다' 는 속담과 같이, 자기 것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우리 고미술의 가치와 성격을 냉정하고 공정하게 파악하여 자기 것에 대한 감상적인 주관이나 맹목적인 찬미가 아니라 진실한 이해, 자신있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남이 쓴 자기 본위의 주관적인 글이 아니라 실물을 통해서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아무리 미인이라고 남이 입으로 설명하여도 자기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 미가 어떤 것인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고미술의 미나 특색을 알려면 단 한 점의 자기, 한 폭의 그림이라도 스스로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서 체감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정말 미술품의 미의 우열을 알고 그 진가를 가려 내고 우리 고미술의 참된 가치를 알고 싶은 사람은, 책도 좋고 강의도 좋지만 박물관에 가서 자주 실물을 보고, 또 될 수 있으면 저기가 직접 돈을 내서 조그만 미술품이라도 사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비교하고 느껴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특수한 소수의 미술품 수집가는 있으나, 일반 사람으로 자기의 주위에 조그만 미술품 하나라도 놓고 있는 사람은 새벽의 별처럼 드물다. 이런 현상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국민 전반의 고미술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고미술에 대한 관심과 우리의 자신감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결국 이 관심과 자신감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족적 감정이나 감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 고미술의 진가와 미의 정체를 스스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각자가 나름대로의 평가와 감상 능력을 지녀야 할 때가 왔다. 그래서 우리 미를 무턱대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국미의 본질을 체감하고, 그 전통이 각자에 의해서 다음 대에 계승되고, 궁극적으로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인식되고 평가되도록 해야 한다.

삼국 미의 특색

우리 나라 미술의 특색은 삼국 이래로 잘 나타나 있다. 삼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1. 백제2. 신라 각국에 따라서 표현 기법의 세련정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정치적3.지리적 조건과 지역적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외국 미술에 대한 반응 아니 수용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같은 중국 남북조 시대 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 북조 미술에 더 직결되고 있는 고구려, 고구려적인 요소를 다분히 기반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남조의 미술에 보다 예민했던 백제, 그리고 그러한 삼국 미술의 엄격한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 강한 향토색을 지니고 있는 신라, 이렇게 삼국은 각각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삼국은 대상에 대한 공통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미에는 통일성 있는 유형이 있다. 그것은 자기의 주관을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구상(具象)하려는 순진한 태도요, 접근 방식이다. 표현의 방법이나 기법에서는 어긋남과 불합리, 부조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조화가 가져오는 말할 수 없는 조화와 통일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마치 나이 어린 꼬마 동생이 그려 내는 사람과 전차의 그림과 통하는 세계이다.

국립 박물과의 삼국 시대실에 들어가면 조그만 기마형 신라 토우 (騎馬形新羅土偶)가 두 개 있다. 이 두 개의 인형 같은 기마상은 경주의 금령총에서 1926년에 발굴된 것이다. 직접 가서 보면 알겠지만, 말은 머리가 이상하게 크고 사지는 너무 굵고 짧아서 그것을 타고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 올라 앉은 정장 차림의 귀인은 나름대로의 위품을 과시하고 있고, 그 앞에 서서 길을 비키라고 동탁(銅鐸)을 흔들고 있는 하인의 가슴은 뒤로 젖혀져 있다. 이것을 보면 신라판 동키호테를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이 느껴지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을 만든 신라의 도공은 젊은 나이에 죽은 왕자의 명기(名器)로서 가장 엄숙한 마음으로 이 토우를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진지한 태도는 가장 애써서 빚은 말의 콧잔등에 잘 반영되고 있다. 그가 파악한 말의 가장 인상적인 해부학적 특징은 흐물거리는, 독특한 감촉을 주는 코와 그 언저리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그 부분을 재현하는 데 가장 노력하였으며, 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인 특유의 '아무렇게나' 하는 생략과 무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토우는 통일체로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신라의 토기에서도,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도 똑같이 엿볼 수 있다. 다 알다시피 신라의 토기는 검은 회색의 매끄럽지 못한 태토(胎土)이며, 그것을 밥상에 놓으면 나무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식기로서는 매우 모자란 물건이다. 신라인들이 정말 이런 토기를 일상 식기로 썼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시되는 점이 적지 않다. 그만큼 식기로서는 막되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 신라의 토기가 많은 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이 옛스럽고 투박한 신라 토기에 말 못할 현대적 감각이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현대 미술이 발버둥치며 도달하려고 하는 '변형', '생략', '직관'의 참다운 정신이 바로 여기에 가장 순수하고 담담하게, 그러면서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저력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상(抽象)과 사실(寫實)은 결과가 전혀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근본 정신을 파고 들어가면 하나이지 둘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 이와 같은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즙안(楫安)에 있는 무용총의 수렵 광경 그림이다. 산이 첩첩한 어느 북쪽 땅의 초원에서 한 무리의 고구려 기마 무사들이 명적(鳴鏑)으로 산야를 진동시키면서 호랑이와 사슴을 사냥하고 있다. 이것은 몹시 살벌하고 긴장된 장면이다. 무사의 관모에서 깃털이 나부끼고, 쫓기는 호랑이와 사슴들이 필사적으로 뛰고 있다. 그러나 산맥은 몇 줄기 굽이치는 선으로 표현되고, 손바닥 같은 이상한 나무가 여기가 산이요 하고 표지판처럼 서 있다.

호랑이는 호랑이지만 무슨 큼직한 고양이 같고, 사슴은 사슴이지만 빚어 내는 분위기는 동화에 나오는 토끼와도 같다. 그리고 좁디좁은 하늘에는 그것이 하늘임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새를 상징하는 이상한 도안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기병과 저격 군단은 수.당의 대군을 궤멸시킨 용감한 군인이며, 고구려의 용맹은 당시의 극동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그 미술에는 쳐다보면 미소가 나올 정도의 순진한 자연주의가 넘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삼국이 공유하는 한국적 세계인 것이다.

통일 신라 미의 의의

이러한 삼국 미술의 특색은 통일 신라로 그대로 계승되어 간다. 통일 신라의 미술 활동의 중심은 두말할 것 없이 서울이었던 경주 지방이었다. 여기는 옛 신라 미술의 강한 향토색이 뿌리를 박아 왔던 곳이며, 그 향토색은 일시에 쇠퇴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의 기술과 전통이 삼국의 통일로 여기에 모여들었고 감화력이 강한 당의 국제적 미술이 개방된 문호를 통해 이리로 곧바로 들어와서 통일 신라의 미술은 종래에 보지 못한 세련된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신라인의 모습은 그러한 국제적(범 극동적) 양식에 휘말려 없어지지 않고 더욱 개성있는 신라인의 양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우리 나라의 고대 미술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출발에 있어 중국의 미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세계의 고대 미술이 몇 개의 미술권으로 구분되고 각기 미술권마다 일종의 중심 세력이 있었던 관계상 부득이하고 역사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나라, 각 민족의 미술이란 그러한 미술권에서 어떠한 지역적인 변화와 개성있는 발전을 이룩하였는가에 단일 미술로서의 의의와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통일 신라의 미술 중에는 지나치게 중심 미술의 양식이나 원형에 편중하고 모방 위주의 성격을 띠는 것도 간혹 있으나, 신라 미술의 기본형은 삼국 이래의 엄연한 신라로 머물러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주의 석굴암이다. 석굴암 자체는 그 기본 아이디어가 중국의 석굴사를 모방한 것이고, 내부 조각들은 그 정형이 예를 들면 서안 보경사의 석불군 같은 데서 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석굴암의 조각은 여체(女體)의 곡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경사 부처에서 보는 속된 관능적 에로티시즘이 전혀 없다. 거기에는 매끈하게 흐르는 지방(脂肪)이 있지만, 여기에는 그저 순수하게 동결된 불상의 품위가 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천진 난만한 어린 아이 (같은 어른)가 만들어 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그린 여자의 나체화를 보고 우리가 에로틱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한국 미술의 세계요, 기본적 출발점인 것이다.

일본의 미술사가인 유종열은 한국의 고대 예술인들의 세계는 '사고 이전(思考 以前)''인위 이전(人爲 以前)'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한국미의 정신을 실로 정확하게 표현한 말로 여기에 더 덧붙을 말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미를 만들어 내자, 완전한 모양을 만들어 보자 하는 따위의 예술가적 사고를 하기 이전, 마치 자연이 산천 초목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인간 이전' '조작 이전'의 경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한국의 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국 미술품의 미는 특출하다는 것이다.

고려.조선 미술의 세계성

고려의 미술은 통일 시대 신라 미술이 말기에 보여주는 매너리즘을 일소하고 청신한 힘을 그 초기에 보여 주었다. 이것은 아마 예술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진 환경은 변화와 왕조 교체에 따르는 혁신적 기풍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이 시대를 통해서 신라에 비해 후퇴된 분야(예를 들면 조각, 건축)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고려 장인들의 미에 대한 태도는 종래와 다름없었다. 우리는 흔히 고려 청자를 아주 고도로 발달되고 장식적인 귀족적 예술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비록 그 색이 다시 없이 뛰어나고 그 문양 배치가 빈틈 없이 완벽하다 하더라도,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이 일정한 정도의 수준에 이르도록 하거나 균일성을 갖추도록 배려한 흔적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불의 온도나 유약의 배합 등에 세밀한 조절이 없거나 그리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태토(胎土)의 빛깔, 형태 등에 현대적 의미에서의 동일 규격품은 한 개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잘 된 고려 자기에서도 같은 시대의 중국, 즉 송나라 자기가 보여 주는 기계로 만든 것 같은 쑥 빠진 형태, 말끔한 굽, 또 균일한 색 등의 '직업적' 완벽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고려 청자는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발하게 하고 있다. 결국 인위 이전의 헙수룩한 세계에서 만들어진 자연의 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가 시냇물에서 아무렇게나 씻은 열무나 배춧단을 서로 아무 말 안하고 사고 파는 전통적인 한국의 세계인 것이다.

조선에 들어오면 양반들은 미술에 대해서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미술 활동은 정신면에서나 기술면에서나 공장(工匠)들 자신의 것으로 되고 말았다. 그것은 미술 발달에 방해가 된 점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바닥을 흐르는 가식 없는 미의식이 장인들을 통해서 솔직 대담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 한국의 미는 조선 시대의 도기품이나 목공품 같은 민예품(民藝品)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조선의 도자기나 목공품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특색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소재의 미를 살리고 될 수 있는 한 인공적인 면을 줄이자는 데 있다. 조선의 도기품처럼 공간을 많이 남겨두는 예를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 큰 백색 항아리에 한 포기의 가을 풀을 그리고, 그것이 땅에 솟아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가로로 선이 하나 그어진다. 그 선의 위가 하늘이고 그 밑이 땅인 것이다. 광막한 지평선에 풀 한 포기, 그저 그것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넓은 우주이다. 대단한 솜씨다. 그러나 이 도공은 그러한 효과를 노리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할아버지가 그렇게 그렸고 아버지가 그렇게 그렸기 때문에 자기도 그저 그렸을 뿐이다. 어느 전시회에 출품하려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특별한 주문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때가 오면 지게꾼이 오거나 달구지가 와서 그 그릇들을 모아서 서울이나 딴 곳으로 실어 갈 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 아니 바로 그래서 그렇게 인공이 아닌 미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적 미의 세계인 것이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 세계를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몸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미의 재발견

한국의 미는 예술인들이 목표로 하는 궁극적인 미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미술품은 직관적이고 청신하고 무한한 맛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가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고미술품은 어떤 환경에 놓여서도 제자리에 앉은 것 같은 고대성과 현대성을 갖추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인이며 고대인이 아니다. 결코 회상에 사로잡혀 현대를 고대로 돌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옛날이 지금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기력 빠지고 희망 없는 노인들의 생각이다. 전통이란 그 위에 서서 미래로 발전해 나아가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또 그러한 전통의 발판 없이 민족 문화의 발전이란 있을 수도 없다. 그리고 전통이란 몸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데서 보존되고 계승되어 간다. 몸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자랑하고 큰소리쳐서 전통이 이해되거나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김원룡/ 한림대 객원 교수이며, 저서로는 '한국고고학 개설'과 '한국고고학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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