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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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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김 재 화

 

 

'성공의 법칙'과 그로부터 소외된 인간

두 개의 커다란 가방을 양손에 들고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는 세일즈맨 윌리 로 먼(Willy Loman).이 극의 제목처럼 우리는 막이 열리면 처음부터 죽음 가까이 와있는 주인공을 만난다. 그 가방 속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가는 작품 속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그것이 무엇인 가는 사실 이 극에서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34년 동안 줄곧 한 회사 물건을 선전하며 외판하고 다닌 세일즈맨의 삶에서 이제 남은 것은 결국 그 자신을 팔고 다닌 것처럼 소모된 한 인간의 가치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일즈맨이란, 팽창 일로에 있는 도시 산업화 시대에서는 이 작품에서처럼 간신히 한 뼘의 햇빛이 드리울 정도의 작은 마당을 지닌 집에 사는 보통 시민이다. 그 집을 둘러싼 빌딩 숲에서는 이미 전원의 향취라고는 한 가닥도 찾을 수 없이 숨막히듯 도시의 냄새만 풍길 뿐이다. 주인공 윌리 로몬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시골에서 플루트나 만들면서 여기저기 떠돌며 그것들을 팔아 유유히 목가적 삶을 영위했던 삶의 방식이 어쩌면 훨씬 더 어 울리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대 도시 가운데서도 첨단 도시인 뉴욕 교외 한 모퉁이에 살면서 뉴잉글랜드 지방을 개척했다는 자부심을 안고 사는 그는 63세인 지금도 세일즈에 일편 단심 매달려 있다. 그러나 그의 판매 실적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이렇듯 좌절한 보통 시민의 한사람을 만나는 관객은 자기들의 일처럼 그를 동정하고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이 갖는 개인적 약점을 제처 놓고. 그들 자신도 현대 사회에서 성공의 길이 점점 멀어져 감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미국인이 갖는 '미국적 꿈'은 개인이 추구하고 노력하는 만큼 성공의 대가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과가 없으면 도태되고 마는 능률 제일주의의 산업 사회에서 윌리 로먼 처럼 구시대적 사고 방식을 고집할 때 대개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의 성공술이란 호감을 주는 인품을 내세우는 것이었고, 그 아들들에게까지 이 막연한 처세술을 심어 주려고 한다. 그래서 2대에 걸쳐 로먼 집안은 실패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자식에게 걸었던 기대 마저 좌절되어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하고 ,그 보험료를 받아 가족을 살리려 하지만 의미없는 한 인간의 삶의 종말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이 글은 이렇게 '보통사람'의 존엄성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통 비극과 다르다.작가 밀러는 현대 비극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글, '비극과 보통사람'에서 그 의 현대 비극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즉, 전통 비극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비극의 주인공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에서 비롯한 '위대하고 고귀한 특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그런 높은 신분의 인물에게 비극이 일어났을 때 일반 시민들은 경외감을 갖고 운명 앞에 자그마해지는 인간의 비극성을 통감하였다.'연민'과 '공포감'을 통해 '정신적 정화 작용'을 갖게 되는 것이 비극을 보러가는 관 객들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밀러는 이제 귀족과 평민의 계층 구분이 없어진 현대 사회에서 그런 전형적 주 인공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으며'보통 사람'이 당연히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회랍 시대의 비극의 요인이었던 '운명'의 힘은 현대에서는 외부적 압력 요소인 '사회'로 바뀌게 되고, 비극적 주인공이 가졌던 성격적 결함도 이제는 그 사회에 대한 주인공의 의지로 바꾸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볼 때, 윌리 로먼이란 주인공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법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소외된 비극적 인간인 것이다.

또한 이 극을 감상하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사회와 인간'이란 사실주의적 문 제가 담긴 작품을 작가는 표현주의 기법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즉, 윌리의 현실 세계는 사실주의적 시각에 맞추어져 있고, 한편 그의 내면 세계는 표현주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무대 위에서 동시에 교차되는, 주인공의 양분된 의식 세계가 삽화적 성 격으로 극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과거의 환상이 자유로이 유동하여 현재 시간의 흐름에 적절히 결합된다.

이런 장면들은 특히 무대 장치나 조명 등에 의해 의도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장면의 구 붕이 명확하지 않아도 무대분위기의 변화,또는 어조나 음향 효과 등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을 유도해간다. 한 예로, 윌리가 과거의 몽상에 빠질 때는 무대 장치의 벽을 자유로이 빠져 나가는 동 작을 보게되며, 플레쉬백 기법, 무대의 색조 변화 등 시각적,청각적으로 다양하게 그 시제가 표현되고있다.

 

그럼 이쯤에서 극의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직업의 실패와 지식에 대한 희망의 좌절

윌리 로먼이 이 날 따라 갑자기 일찍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극은 시작된다. 그는 34년동안이나 줄곧 와그너 회사 외판원으로 근무해 오면서 본사가 있는 뉴욕보다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개척자로서 아직도 그 지역에서 긴요한 인물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차를 몰고 다니는 것도 예전같지가 않다. 나이 탓만은 아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점점 높은 건물들이 그의 집을 에워싸 그의 정원이 보잘것없이 손 바닥만해 진 것처럼 그의 생존도 고립되어 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내 린다는 남편이 지쳐 있음을 금세 알아차릴 만큼 그를 이해하고 의지한다.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보내고 온 지가 불과 얼마 전인데 벌써 저렇게 지친걸 보니 아무래도 뉴욕 근무를 강력히 요구해야 된다고 린다는 생각한다. 오늘 남편이 일찍 돌아온 것도 운전을 하면서 자꾸만 몽상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니 정말 차 사고라도 나면 큰일인 것이다.

그러나 윌리는 회사의 젊은 사장으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 있는 형편이여, 고정적인 월급도 취소당하고 판매에 따른 커미션만이 수입의 전부이다. 사장은 몇십 년 근무한 직원일지라도 성적에 따라 사정없이 해고시킨다는 능률 우선주의 회사 안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것은 모두 지나간 시절의 일이다. 윌리 로먼의 집에는 때마침 오랜만에 두 아들이 돌아와 있다. 큰아들 비프는 34살이 되는 지금도 아직 안정된 직업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축구 선수로서 인기가 있었던 그였지만 졸업 직전에 수학 시험 낙제하여 그 후 이것저것 직업을 바꾸며 사랑 왔다. 둘째 아들 해피는 취직도 하고 아파트도 지니고 얼핏 화려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진정한 인간 관계, 진실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여성과 교제를 이루지 못하고 허황되게 산다.

아들들의 출세를 꿈꾸며 살았던 윌리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회사 일과 더불어 두 아들의 이런 처지가 지금 그의 좌절과 고민 원인이 되고 있다. 비프로서도 그 나름대로 좌절의 이유를 갖고 있다. 학생 시절 수학 점수 때문에 황급히 아버지와 의논하기 위해 보스턴의 한 호텔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그는 출장중의 부친이 여자와 함께 있는 부도덕한 행적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는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 동안 우상처럼 자리했던 아버지의 절대적 영상이 완전히 깨어진 것이다. 대학 진학의 희망을 버린 것도 그때이다. 그럼 아버지의 로먼의 삶은 어떠한가. 집에는 착한 아내가 있었고 월부로 집도 한 채도 하고, 그의 변명대로 집 밖거리를 돌아 다닐 때 때로는 고독해 여자를 만나기도 하고, 미래 희망을 걸었던 자식들도 있고,일 면 독선적이라 할 만치 단순한 삶을 살아 왔다. 그러나 속으로는 월부에 시달리는 생활이었다.

주택과 냉장고 등의 월부금 ,또한 보험료를 내야 되고, 지금은 그 걱정에 자동차 운전이 위험할 만큼 환상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내의 걱정과 권유로 젊은 사장을 만나 외판원에서 뉴욕 본사 내근직을 요청해 보지만 일언지하게 거절당한다. 그뿐 아니라 흥분하여 횡설 수설하는 바람에 아주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까지 듣고 집으로 돌아온다.

한편 비프도 직장을 구하나 실패하고 만다. 실은 그가 오랜만에 집에 온 것도 그 동안 절도죄를 범하여 약3개월 동안 형무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실토한다.

비프는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감, 그가 평범한 샐러리맨에 불과하면서도 필요 이상의 자부심으로 현실 감각을 상실한 탓에 있다고 그를 원망한다. 윌리에게 한때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 그의 형 벤은 그보고 세일즈맨을 그만두고 광산에 가도록 권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에 대한 허세와 안정된 현직업에 안주하려 하는 아내의 영향도 있어 그런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형에 대한 환상은 지금 그의 가슴에 엄습해 오는 회한으로 점점 심해져 서 그는 형이 아프리카에 건너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여 대성공한 모습을 환영으로 뒤쫓는다. 그런 환상 속에서 위리는 정신없이 자동차를 몰고 나가 스스로 자살의 길을 택한다.

그의 장례식날 묘지 앞에 모인 사람이라고는 아내와 두아들 그리고 옆집의 찰리 뿐이다. 아내 린다가 이제 집의 월부금 내는 일도 다 끝난 마당에 정작 집에 살 사람은 가고 없다고 슬퍼하는 데서 이 극은 끝난다.

이름 없는 소시민들에게 보내는 동정과 연민

윌리 로먼에 대하여 아내 린다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위대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큰 돈을 번 사람도 아니요,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분은 한 인간이었어.그런데 이제 그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잘 보살펴 드려야 해. 늙은 개처럼 쓰러져 무덤에 들게 해서는 안 된다. 보살펴 드리는 일 , 그 일만이 그런 분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버지가 미쳤다고......"

린다는 말처럼 작가는 주인공 윌리에게 동정의 시각을 보이고 있다. 많은 평자들은 윌리 의 개별적인 성격적 결함을 들어 그의 비극은 그의 약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비극적 무게가 없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현대의 보통 사람의 비극에서 웅장한 죽음의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작가는 구시대가 갖는 낭만성을 장점으로 비춰 주면서도 그것은 통렬하게 비난하는 부분도 없다. 같은 소시민이면서도 현실을 충실하게 받아들여 안정된 삶을 사는 옆집 사는 옆집 찰리 와 버나드의 묘사에서도 우리는 작가의 긍정적이며 열려 있는 객관적 시각을 보게 된다.

주인공이 갖는 패배감은 지나친 기대감에 스스로 포로가 된 탓인지 사실극에서처럼 사 회의 모순이 큰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의 적응 의지 여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윌리 직업관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그가 우상으로 삼고 세일즈맨의 직업에 뛰어든 인물로 데이브 싱글맨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는 이 극의 등장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윌리의 전시적인 직업의식을 대변해 주며 그 당시의 가치관을 보여 주는 극적 기능을 준다. 싱글맨은 벨벳 슬리퍼를 신고 호텔 방에서 전화 한 대로 바이어들을 불러 들여 손쉽게 물건을 팔아치우는 놀라운 처세술을 지닌 인물이었다. 84살 까지 그렇게 하여 31개주 방방곡곡 판매망을 넓혔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도 그야말 로 '세일즈맨의 죽음'답게 화려했으니 몇 백명의 세일즈맨과 바이어들이 줄지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상거래, 거기엔 존경심과 동지애로 서로 삼사하는 마음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이제 비현실적 가치관으로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당신의 첨단 통신 수단이었던 전화라는 기계는 이제 보통의 것이 되었고, 현 젊은 사장이 사무실에서 신기하게 만지고 있는 녹음 테이프 같은 것이 등장한 것이다. 월리가 항변하듯 말하는 '단물만 빼마시고 껍질은 내동댕이치는'소위 타산적 자본주의 경영 철학은 이제 너무나 당연하게 일반화되어 그것을 비판하는 윌리야말로 점점 정신나간 사람처럼 비쳐진다. 아내만이 여전히 그의 성격을 변함없이 그리고 답답하리만치 진전 없이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사장이 갓난아기였을 때 윌리 자신이 그에게 하워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큰소리를 쳐봐도 지금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 뿐 아무 감동도 느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 1982년도에 가졌던 자동차를 지금 몰고 다니는 것처럼 착각하듯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 1982년은 바로 그가 희망을 걸었던 장남 비프의 최고의 해였다. 비프가 고등 학교 시절 풋볼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때였다. 즉,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은 시시각각 그의 현실 세계에 분계선 없이 들락날락하여 그의 불안을 은폐시키고 자위함으로써 삶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극 시작에서 보는 주인공은 끝에 가서도 정신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인물로 남는다.직업인으로서의 실패와 자식의 실패를 그의 삶 전체의 실패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디에 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가족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아내 린다는 이해하고 보살피기는 했으나 남편에게 삶의 활력을 되찾아 주는 역할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기회를 가로막고 현상 유지의 안일함을 택했으니 의지력 없기는 더 할뿐이다.

아들들의 성장과정에서도 부모 , 특히 아버지의 엄한 가정 교육 없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오히려 그들이 지닌 약점을 물을 주고 키워 놓았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점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아버지는 비프가 농구공을 훔쳐와도, 또 두 아들이 공사장에서 나무토막을 집에 갖고 와도 모두 씩씩하고 진취성 있는 행동으로 칭찬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이 서른이 넘은 자식들이 아직도 사춘기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마는 데, 그것은 오직 그들 자신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윌리의 비극을 조장, 방관하는 역할을 할 뿐 적극적으로 윌리와 대결하는 강한 극적 기능이 없다. 윌리는 고집스러우리만치 비극의 요인들을 혼자의 방식으로 처리하여 자신을 소모하였다. 현실에 잘 적응하여 안정된 삶을 사는 옆집 찰리의 삶이 윌리 에 견주어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이 극이 도덕적 교시를 제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할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린다의 대사를 통해서 시사한 것처럼 윌 리가 비록 위대한 인생을 산 인물이 아 닐지라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의 불행은 충분히 관십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름없이 살다 가는 현대의 많은 소시민에게 보내는 동정과 인간애의 조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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