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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향해 열린 가락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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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향해 열린 가락

권 덕 원

 

 

우리들은 오랫동안 리듬 선율 화성을 음악의 3요소라고 배워 왔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요즈음에도 학생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음악의 3요소'가 리듬 선율 화성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음악의 3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화성은 서양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서양 음악의 역사 속에 화성의 개념이 없는 시대---예컨대 오르가눔이 태동되기 전의 단선율 시대나 혹은 현대의 음악 가운데 화성의 개념을 전혀 도외시하는 일부 음악---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음악 애호가들이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서양 음악에는 거의 화성 개념이 중요한 하나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화성이 음악의 3요소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었고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본다면, 화성은 서양 음악의 3요소에 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음악의 3요소에 들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서양 음악에서도 물론이려니와, 서양 이외의 지역 음악에는 화성의 개념이 없는 음악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음악이란 화성의 개념이 없이도 훌륭한 미적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며, 그런 음악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전통 음악이다. 국악에도 물론 단편적인 화음들이 있기는 하나, 이것들은 의도적인 화음 체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각 성부의 자연스런 진행을 위하여 무의도적으로 생성되는 화음들이다. 그러므로 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전통 음악은 화성이 없는 음악이다. 그런데도 국악이 독특한 미적 가치를 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 음악은 다성 음악을 발전시켰으나, 대신 인도나 중국의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선율과 정교함을 잃었다."고 D.J. 그라우트는 그의 저서 '서양 음악사'에서 말했다. 그가 서양 음악이 다성 음악으로 발전해 온 과정에서 잃었다고 말한 '선율과 리듬의 정교함'은 동양 음악의 한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요소가 되었다. 국악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선율이 정교하고 리듬이 발달한 음악에 속한다. 예컨대 단소나 대금으로 연주하는 <청성곡>을 세심하게 듣고 있노라면 그 선율이 얼마나 복잡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선율은 서양 악기로는 결코 연주해 낼 수 없는 것이며, 흉내 내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라우트는 이러한 선율의 정교함이 서양 음악의 다성적 발전과 비견될 수 있는 요소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국악에서 이렇게 선율을 정교하게 하는 기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선 농현(弄絃), 혹은 요성(搖聲)이라는 기법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음을 떨어 주는 것으로서 국악 선율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기법이다. 흔히 현악 주법에서는 농현이라고 하고, 관악이나 성악의 주법에서는 요성이라고 하는데 기법상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가까운 예를 가야금 산조나 전라도의 민요 등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또 다른 기법으로는 전성(轉聲)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음을 급격히 짧게 떨어 주는 것으로서 음을 굴리는 기법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 전성 기법으로 처리되면 그 음은 거의 언제나 4도나 5도 위의 음으로 상진행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법에는 퇴성(退聲)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음을 낸 후에 그 음이 미분음적으로 하진행하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새야 새야>노래를 들 수 있는데, [악보1]에서 ※표시한 음은 그 다음의 음으로 미끄러지듯이 진행한다. 이것이 퇴성인데 위의 노래를 퇴성 없이 한번 불러 보고, 또 퇴성을 넣어서 한번 불러 본다면, 그 차이점과 퇴성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기법으로 추성(推聲)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주로 거문고 주법에 있는 것으로, 어떤 음을 소리낸 후에 그 음을 잠시 높였다가 다시 낮추는 기법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농현(요성)이나 전성, 퇴성, 그리고 추성 등은 어떤 한 음을 가지고 변화를 주는 기법인데, 국악의 선율을 정교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장식음 기법이 있다. 서양 음악에도 다양한 꾸밈음이 있어서 선율을 아름답게 꾸며 주듯이, 국악의 선율에도 다양한 장식음들이 있다. 이런 정식음들은 특히 관악기에서 더 발달하여 각 악기마다 수십 가지에 이르는 장식음을 가지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는 것보다는 악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여 <청성곡> 첫 부분([악보2])을 제시해 본다.

다음 악보를 잘 살펴보면 주요음의 진행이 있고 그 주요음 진행의 사이에 장식음들이 있어서, 이 장식음들이 주요음들을 꾸며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장식음은 주요음의 앞에서 꾸며 주고, 또 어떤 장식음은 주요음의 뒤에서 구며 주고 있다. 이 선율의 진행에서 장식음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얼마나 무미 건조한 선율이 되고 말것인가. 그래서 이런 장식음이 국악의 선율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국악의 멋을 좀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식음들의 아름다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장식음들이 가지는 음악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전인평 교수는 그의 책 '국악 작곡 입문'에서 "음악이 느릴수록 장식음이 많이 붙고 복잡하며, 빠를수록 간단해진다."고 하였다. 이 말은 템포가 느린 곡일수록 장식음이 더 발달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국악이 너무 느려서 듣기가 힘들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국악 선율의 중요한 특질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빨라서 좋은 음악이 있는가 하면, 느려도 그 느리게 흐르는 선율 속에 숨어 있는 맛 때문에 좋은 음악이 있다. 농현 혹은 요성, 그리고 전성 퇴성 추성 등의 기법으로 만들어지는 선율의 미분음적 진행, 그리고 다양한 붙임으로 이루어지는 선율의 장식적 진행, 이 미분음적인 진행과 장식적 진행 속에 면밀히 이어 가는 가락의 선(線), 바로 이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선이야말로 국악의 독특한 미적 특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국악을 들을 때, 서양 음악에서 볼 수 있는 화성적 풍부함이 국악에는 없기 때문에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서양 음악을 들을 때, 국악에서 볼 수 있는 선율의 정교함이 없기 때문에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과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를 향하여 자신이 서 있는가 하는 문제이지 미적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서양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선율이 나오면 그 선율이 대위법적으로, 또는 화성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살피는 작업이 중요하듯이 국악을 들을 때는 그 선율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그 진행되는 과정에 각 음들은 미분음적으로 또는 장식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혹 국악을 많이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까다로운 요구가 될지 모르나, 우리가 서양 음악을 이해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과 정성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쉬운 일이 될 수 있다.

가락의 위, 아래를 동시에 살피는 수직적인 작업 대신에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가락의 여행길을 찾아 나서는 횡적인 작업이 선행될 때, 우리는 우리 전통 음악에 숨겨진 한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권덕원/ 한국교육개발원연구원이며, 저서로는 '그림이 있는 음악 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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