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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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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구 회 영

 

할리우드, 꿈과 전쟁의 역사

영화가 인류의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것은 20세기초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1930년대의 대공황, 그리고 몇 번인가의 전세계적 정치 ·경제 질서의 개편을 겪으면서도 할리우드는 결코 그 중심의 자리를 내놓은 적이 없다. 이제 할리우드라는 만국 공통어의 무게는 너무도 막강한 것이 되어, 그 당연함의 까닭을 묻는 일이 차라리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고고학은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 지배가 미리부터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가 그들의 국민적 영웅인 에디슨의 발명품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미국인들의 신화와는 달리, 우리가 오늘날 극장에서 대하는 영화 체제는 19 세기 중반에서 세기말에 이르는 사이 주로 유럽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여러 '눈요기'거리 발명품들의 합성에서 비롯되었다. 영화 역사의 출발점에서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할리우드는 그 여러 중심 가운데 하나 이상도 또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할리우드의 세계 제패를 위한 조건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 그것은 바로 구식민지 제국 사이의 첨예한 대립에서 폭발한 제 1 차 세계 대전이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자본과 노동의 효율적인 결합 방식을 찾아내어 이전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연예 산업의 꼴을 본격적으로 갖추어 나갈 즈음, 1 차 대전은 유력한 경쟁자였던 유럽의 영화 산업을 초토화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유럽 영화 산업은 복구를 서둘렀고 머지않아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였지만 이미 할리우드는 규모와 시스템의 정교함에서 유럽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 있었다.

할리우드의 위기는 언제나 문화 산업의 내부에서 첫 조짐을 보여 왔다. 첫 번째 위기는 발성 영화의 등장이라는 기술 혁신이었다(1962년). 이미 완성 단계에 들어선 스튜디오 시스템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자본가들에 맞서서, 일부 모험적인 영화인들은 최초의 상업적 발성 영화인 <재즈 가수>를 제작하여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대중은 더 새로운, 더 풍부한 영화를 원했고 할리우드는 과거에의 집착을 버리고 재빨리 변신하였다.

30년대의 할리우드가 대공황 속에서 지친 미국 대중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하며 경쟁자 없는 연예 산업의 왕좌를 굳혔다면, 제 2차 세계 대전은 할리우드가 전세계적 규모로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 종주국의 위치를 차지한 미국은 그들의 세계 지배 전략을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Pax Americana)'라는 말로 미화하였고, 할리우드 영화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위한 상품 아닌 '미국의 꿈'을 전세계에 수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단지 신기한 구경거리였던 영화는 산업화된 지 반 세기도 채 되지 않아 체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할리우드 내부에서는 작은 위기가 그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광범한 보급은 할리우드 영화가 최초로 맞이한 본격적인 도전이었다. 1950년대 할리우드는 대형 화면, 입체 음향,입체 영화 - 심지어는 '아로마라마(Aromarama)'라는 이름의 '냄새나는 영화'에 이르기까지 - 등의 기술 혁신으로 TV와 맞서려 했으나, 그 결과는 지나친 제작비 투자로 인한 대제작 회사(major studios)의 재정난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할리우드의 주도권은 자본가 이며 동시에 제작자였던 '거물'들의 손을 떠나, 은행가와 전문 경영인과 투자 브로커들로 이루어진 지단들에게로 넘겨졌다. 독립적인 영화 제작소 들은 일찍부터 TV와 손을 잡고 하청 제작 방식으로 공생의 길을 택했는데, 이들의 발언권 강화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몰락과 함께 할리우드의 '권력 구조'를 바꾸어 놓은 큰 사건이었다.

할리우드 내부의 위기가 구조 조정에 상관없이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 지배는 날로 그 강도를 더해 갔다. TV와의 대결을 포기하고 화해와 공존의 길을 택한 뒤로 이제 할리우드는 거대 매체 산업 복합체로 질적·양적 전환을 이룩하였고, TV가 보급된 전세계 어느 곳에나 할리우드 영화를 침투시켜 들어갔다. 토착 영화 산업이 TV에 관객을 빼앗기고 몰락의 길을 걸어도, 할리우드는 여전히 TV를 통하여 관객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전세계의 영화 관객과 TV 시청자들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만국 공통어를 배우게 되었다. 발성 영화가 TV의 출연에 비교할 만한 - 어쩌면 그 이상의 - 충격을 가져온 이 기술 혁신이 할리우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 해답은 1989년 한 해 동안 할리우드가 비디오 배급을 통하여 벌어들인 수입이 영화로 번 것의 두 배가 넘겼다는 통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제 할리우드의 '위기'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할리우드는 언제나 두 개의 얼굴로 존재해 왔다. 스타와 오스카와 어두운 극장 속 빛나는 스크린으로 재현되는 '꿈의 공장'의 이미지, 그리고 월 스트리트의 모사꾼들과 다국적 영화 기업과 워싱턴 정가의 로비스트들이 진두 지휘하는 영화 전쟁이 야전 사령부로서 존재해 왔다. 그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빼놓으면 할리우드 영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할리우드, 80년대, 비디오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특징짓는 일관된 흐름은 무엇이었을까? '80년대'라는 시대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품고 8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안팎을 들여다보면, 80년대는 이상하리 만치 평온하게 지나간 10년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60년대의 미국 영화 문화를 뒤흔들었던 수많은 운동과 유파, 그것이 할리우드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미친 충격,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죠지 루카스. 프란시스 코폴라로 대표되는 '영화 악동'들이 만들었던 70년대의 '새로운 할리우드'에 비할 만한 사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의 벽두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 그리고 세계 영화 ·영상 문화는 - 심상치 않은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탄생 100주년을 앞둔 영화 문화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할리우드가 몇 차례 겪어 넘겼던 위기 ·기회의 또 하나에 지나지 않는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어쩌면 1980년대의 할리우드는 낡은 체제의 질서 아래 보이지 아는 꿈틀거림을 숨겨왔는지도 모르며, 그것의 의미는 9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야 제대로 드러날 성질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80년대의 할리우드는 명쾌한 새대 구분론을 거부하지만, 80년대 할리우드 영화 교과서의 안과 밖에 드러난 몇 가지 낌새들을 살핌으로써 그것들이 90년대의 더 근본적인 변혁의 '조짐'인지 따져보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증후는 '경제 무너뜨리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중심과 주변, 대회사와 독립 영화, 주류와 소수파의 구분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장르와 장르 사이, 관습과 새로운 감수성 사이를 '넘나드는 일'이 예삿일이 된 것이 80 년대 말의 할리우드 사정이다.

그러나 문화사적 의의가 더욱 큰 경계 무너뜨리기는 창작자/수용자라는 전통적 이분법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80연대의 가장 큰 영상 혁명을 가져온 비디오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제 대중은 수동적인 관객이기를 그만두고, 적극적으로 비디오 영상의 창조자로서 세계를 보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홈무비(home movie)'는 여러 형태로 존재하였지만, 그 보급의 신속함과 전세계적 규모에 있어서는 비디오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당장 우리 나라의 80 연대를 돌이켜 보자. 결혼식, 회갑연, 심지어는 장례식까지 이제 비디오 카메라가 없이는 치러질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달아지지 않았는가?).

엘리트 비평가와 무식한(?) 대중 사이의 간격도 좁혀져 왔다. 대중은 비디오와 케이블TV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아닌 나름대로의 안목과 지식을 가진 특성화된 소집단들로 변모해 갔다. 처음 비디오에 적대적 입장을 취했던 할리우드의 우려와는 달리, 80년대는 대중이 '영화관'을 재발견한 시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비디오 보급률과 비례하여 극장영화의 총관객수가 80년대 중반 이루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이 가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보아도 되리라.

또 하나의 중요한 증후는 주로 할리우드의 기획자와 감독들에 의해 이루어진 '관습 풀어헤치기'이다. 미국 영화 작가들은 할리우드의 전성 시대 - 역사적으로 실재했든 상상 송에서만 존재하든 상관없이 - 에 대한 향수를 끈질기게 장르 영화에 도전함으로써 표출하여왔다. 그러한 시도는 두 가지 경향 중의 하나를 띠게 되는데, 장르의 관습을 충실하게 복 원하는 것과 장르의 관습 자체를 해체함이 그것이다. 전자의 대표적 예로 로렌스 캐스던의 <실버라도>를, 그리고 후자의 예로 브라이언 드 팔마의 <무법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거의 예외 없이 전자의 실패와 후자의 성공으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80년대를 통틀어 할리우드 영화의 모든 장르는 끊임없이 풀이 헤쳐지거나 혹은 다른 장르나 영화 이외의 매체와 접합되어 왔다. 뮤지컬은 MTV(영상 음악, 뮤직 비디오를 대중화시킨 케이블 TV방송국)를 거쳐 <플래쉬 댄스>와 <더티 댄싱>으로 되돌아왔고, 전형적인 가족 영화는 남자들이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는 이야기로 바뀌어 새롭게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미스터 맘마>에서 <세 남자와 아기> -프랑스 영화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번안판 - 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베트맨>과 <10대 닌자 거북이>의 89~90년 사이의 성공은 더욱 많은 '관습 풀어 헤치기'가 90년대에 더욱 잦게 벌어질 수밖에 없음을 예감하게 한다.

이러한 할리우드의 '80년대 증후군'은 다른 민족·지역의 영화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밖에서 보이는 공격성 - 특히 한국에서 - 이 80년대 말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도 할리우드/비할리우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장르의 관습이 해체된 상태를 우리는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새로운 장르? 혹은 포스트 장르, 할리우드의, 그리고 세계 영화의 90년대는 이리하여 세기말에 어울리게 수수께끼로서 시작하고 있다.

작가주의의 죽음에서 장르의 해체로

80년대의 할리우드가 잃은 것은 무엇이며 얻은 것은 무엇일까? 어떤 비평가들은 잃은 것은 '작가들'이고 얻은 것은 '장사꾼들'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다른 비평가들은 잃은 것은'전통'이고 얻은 것은 돌연 변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가운데서 눈여겨볼 만한 것 중의 하나가 '장르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이다.

할리우드의 전성 시대는 스타 중심 체제, 스튜디오 제작 체제, 그리고 장르 영화라는 세개의 버팀목으로 지탱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장르 영화는 가장 '할리우드다운' 영화들로 꼽혔고, 오늘날의 영화사들이 '작가'로 치켜세우는 많은 감독들도 장르 영화에서 대표작들을 남겼다.

히치코크와 공포 영화, 존 포드와 웨스턴, 프랭크 카프라와 서민적 코미디, 하워드 호크스와 갱 영화, 빈센트 미넬라와 뮤지컬, 세실 비 드밀과 역사극 스펙터클, 더글라스 서크와 멜로드라마······.

그러나 1960년대를 경계로 하여 장르 영화는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한다. 장르 영화 흥행을 보증서 왔던 고정 관객들은 TV로 옮겨가고, 대규모 스튜디오의 해체와 독립 영화사들의 난립은 유사한 주제와 줄거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대신 대중의 주목을 끌만한 좀더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쪽으로 대세를 바꾸었다.

1970년대는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장르 영화의 부활을 맞는 듯 하였다. 코폴라의 <대부>(갱 영화), 존 베드햄의 <토요일 밤의 열기>(뮤지컬),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장르로서 <스타워즈>부터 출발하는 우주, 모험, 환상 영화와 <에어포트>, <포세이돈 어드벤처>류의 대재난 영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경향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한 영화가 크게 성공하면 수많은 모방작들이 만들어지는 버릇은 여전하였지만, 장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공통점을 지닌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 대신 80년대 미국의 주요한 영화 작가들은 특정한 작품 속에서 장르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마이클 치미노의 야심작 <천국의 문>이 엄청난 실패를 기록한 것은 80년대 내내 계속된 장르 영화 부활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전주곡이었다. 로렌스 캐스던의 <실버라도>, 코폴라의 <마음으로부터 한마디>, 스필버그의 <1941>은 각각 웨스턴, 뮤지컬, 코미디를 '순진했던' 옛날 처럼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는데, 작품의 높은 완성도에 불구하고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반면 장르의 관습을 영화의 소재로 삼아 변형·재구성한 영화들은 대체로 성공하였는데, 스필버그, 루카스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와 특히 <무법자들>, 그리고 코미디·갱스터·웨스턴이 버무려진 <48시간>, <비버리 힐즈 캅>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부활·변용(풍자를 포함하여)이 대중의 외면·호응을 가늠하는 현상은 어떠한 가설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아마도 80년대의 관객들은 서서히 영화를 현실의 '본뜨기'보는 대신에, 본뜨기에 근거하되 영화들 사이의 상호 연관에 더 의존하는 교과서로 읽기 시작하였는지 모른다. 모든 영화를 그들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 읽으려는 욕망을 지니고,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영화를 우선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8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교과서, <인디아나 죤스>와 <로보캅>

70년대의 할리우드가 80년대로 넘겨 준 재산 목록의 첫머리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의 이름이 올라 있을 것이다. 그리고 80년대 내내, 소수의 실패작이 있었지만 그들의 '흥행 마술'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1989년, 8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들 중의 하나가―때로는 둘이―제작·기획·감독한 영화는 역대 흥행 순위 20위 이내에 무려 10편을 차지한다.(1위 <E.T.>, 2위 <스타워즈>, 3위 <스타워즈 3>, 4위 <스타워즈 2>, 6위 <죠스>, 7위 <레이더스>, 8위 <인디아나 죤스>, 10위 <백투더 퓨처>, 16위 <클로스 인카운터>, 20위<그렘린>).

이 영화들 가운데서 가장 뚜렷한 성격을 가진 '영웅'을 찾으라면 그것은 인디아나 죤스가 될 것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세 편의 영화는 세계 어디에서나 관객을 끌어 모았고, 사이보그와 로봇, 외계인이 기세를 떨치던 8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너무도 '인간적'인 인디아나 죤스의 모습은 이채롭기까지 하다.

최소한의 장비만을 갖춘 채, 숱한 위기를 날렵한 몸놀림과 기지로 헤쳐나가는 인디아나 죤스,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기도 하는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쉽게 동화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예정된 승리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그의 모험에 동참한다.

그러나 겉보기에 무해한 오락물 같이만 보이는 인디아나 죤스 시리즈에는, 철저한 백인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고고학자로서 그의 기량은 오로지 성궤나 성배를 찾는 데에만 바쳐지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에 의하여 직접·간접으로 파괴되는 원주민들의 문화 유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유럽인들은 대게―특히 인디아나 죤스 2편에서 ―미개하고 괴이한 인간들로 묘사되고, 그들 중 똑똑한 몇 몇은 인디의 부하로 일하는 '영예'를 누린다. 물론 그들은 인디에게 전적인 존경과 충성을 바친다. 나머지는 백인들을 '구세주'라고 믿는 순박한 '선인'들과, 기괴한 의식들을 통해 힘을 얻고 선인들을 괴롭히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악인들로 뚜렷이 양분된다. 그래서 인디의 적인―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인―나치가, 유색 인종인 술탄(터키 제국의 지배자들)과 손을 잡는 것으로 묘사되는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백인 우월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한 편의 영화만으로는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영화 바깥의 정치·경제적 관계와 연결된다면 쉽사리 아니라고 답할 수 없다.

절반은 인간, 절반은 기계, 온몸은 경찰

 

(<로보캅 Ⅰ>의 광고 문안)

로보캅은 영혼과 육체의 상실, 그리고 이후 새로운 육체로 부활되는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로보캅Ⅰ>의 감독인 폴 바호벤의 말).

영화 <로보캅>은 위의 두 인용문이 드러내듯 여러 층의 의미로 읽힐 수 있는 '두꺼운'교과서이다. 그 한쪽 끝에는 장쾌한―어지간한 비위로는 감당키 어려울 만큼 잔인한―폭력과 스피드로 특징지어지는 폭력·액션 영화가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종교적인 주제에 대한 심오한(?)성찰을 곁들인 문명·기술·과학·자본주의 비판 영화중의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진정한' 읽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교과서 밖에서 이 영화는 동시대에 또는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들과 연관지어진다. 또 이러한 '밖으로부터 읽기'에는 이 영화가 제작 배경, 제작사의 성격, 국내외에서의 흥행 성적, 또는 감독과 배우에 관한 전기적 지식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장르로서의―공상 과학, 갱스터, 웨스턴, 로맨스가 뭉뚱그려진―성격을 살피는 일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주제를 교과서 안에서 가려내어 바깥에서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로보캅>의 중요한 하위 구성 요소 중의 하나는 '기억'을 되찾으려는 기계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기억이 없는 육체적 기계와 다름없으며, 반대로 기억을 찾은 기계는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인조·모조·합성 인간과 '기억'의 문제가 이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진 영화로는 <블레이드 런너>(리틀리스코트 감독, 1982년)를 들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복제 인간(유전 공학에 의하여 유전자 합성으로 만들어진,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동일하나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들은 로보캅과 다른 방법으로 기억을 찾는다. 로보캅에게 기억은 실재했던 경험들에 대한 것이며, 그는 '진짜' 기억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그러나 복제 인간들은 애당초 기억의 재료인 경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와 사진을 가지고 기억을 만들어 내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을 우리는 기억의 '모조품'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리라.


구회영/ 서울 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영화 조감독이며 자유 기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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