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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북 명인 이매방 - 얇은 사 하얀 고깔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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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북 명인 이매방 -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김 명 곤

 

처용무가 궁중 무용의 꽃이라면 승무는 민속 무용의 꽃이다. 시인 조지훈이 그의 <승무>에서 표현한 대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나비처럼 곱게 쓰고 그 위에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기다란 소매를 허공에 뿌리며 추는 승무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경건한 종교적인 품위가지 느끼게 해 준다.

부처님에게 축원하고 합장을 한 다음 긴 염불로 시작하여 북을 어른 뒤에 타령으로 바꾸어서 다시 북을 어르고, 굿거리를 춘 다음에 본격적으로 북을 두드리고 다시 굿거리로 마치는 승무를 출 때, 왜 북을 두드리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승무의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인 한영숙과 더불어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로 꼽히는 이매방은 자기는 북을 두드릴 때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북에다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두드린다고 한다.

"남들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몰라도 나는 내 승무를 이렇게 설명해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이 깨져서 중이 되었는디 수도를 하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고 속세가 그리워 가슴 속에 왼갖 번뇌가 떠오른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걸 참다못해 그 울분, 화, 이런 것을 춤이나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소할라고 추는 춤이 바로 내 승무라........"

불교적인 용어로 점잖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기원하는 수도승의 내면 세계를 묘사한 춤이라는 말이 되겠지만 그런 어렵고 딱딱한 말보다는 그의 말이 훨씬 쉽고 현실감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승무를 비롯한 전통 무용에 젖어 살아 왔고 특히 승무에서의 북춤에는 세계의 제일인자라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 세계에 뼛속 깊이 통달해 있는 까닭이리라.

승무를 출 때는 누구나 '천수북'이라고 불리는 북을 앞에 놓고 북채 두 개로 '구래'라고 불리는 가죽 부분과 '변죽'이라 불리는 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북춤을 추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북춤을 한 번 보고 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북 가락은 싱거워서 들을 맛이 안 난다고 할만큼 사람의 속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다.

"소리나 춤이나 타고나야지 억지로 하면 안 돼요. 관중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간에 그 사람들을 잡았다 놨다 험시 관중들 오장을 속속들이 후벼 놓고 울려 놔야 명창이니 명무니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명창이 되고 명무가 될 수 있나요. 나는 우리나라에 명무는 딱 세 사람밖에 없다고 봐요. 김천홍 선생, 한영숙 선생, 그리고 나......"

스스로 자신의 춤이 명무라고 자부하는 것은 작년에 <북소리>라는 무용 인생 50년 특별 기념 공연을 할 때에 판소리 명창 김소희가 "앞으로 우리 나라에 이 분처럼 춤 잘추는 사람이 다시 나올까 의문이다"고 칭찬한 말이나 명무 한영숙이 "북춤에 있어서는 한국 아니 세계에서 유일한 분이다"고 칭찬한 말에 힘입은 바도 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한눈 팔지 않고 춤 속에서만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

"세 살 때부터 누님들처럼 머리 땋고 쪽 찌고 머리 틀고 치마 저고리 입고 경대-지금 거울이라고 허는 거 말예요- 앞에서 춤을 췄다니까 말해서 뭘 해요. 자라면서 남자애들하고는 안 놀고 맨 여자애들하고 소꼽장난하고 놀았어요. 주위에서는 이씨 가문에 만고에 없는 굿쟁이가 나올랑갑다 하면서 걱정들을 했지요."

과연 주위에서 걱정한 대로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 몰래 전라남도 목포 권번에서 이대조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대조 선생이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대까지 무업을 해 오다가 아버지께서 무업을 끊고 일체 자식들에게 그 일을 못하게 했는데 내가 다시 그 업을 이어받은 거지요. 그러니 피는 못 속이나 봐요."

할아버지에게서 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허튼 춤'을 배운 뒤에 광주에 와서 국민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광주 권번에서 박영구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이창조에게 검무를 배웠다.

"요새 와서 알게 된 건데 승무로 치면 내가 오 대째라는 거예요. 맨 처음 승무를 창시한 분이 신방초라는 분이고 그 다음이 이정선 선생, 그 다음이 김금옥 선생이고 김금옥 선생의 제자로 한성준 선생과 박영구 선생이 있는데 한성준 선생 밑에서 한영숙씨가 나오고 박영구 선생 밑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지요."

승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인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확실하게 단정을 내리기 어렵다. 게다가 신방초가 승무의 창시자라는 설은 문헌의 고증이 없어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고, 다만 여러 원로 무용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계보를 추적해 올라갈 때에 승무계에서 제일 '웃어른'으로 꼽히는 사람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무난할 듯하다.

어쨌든 그러한 계보를 거쳐 전해진 승무를 그는 박영구에게 회초리를 맞아 가며 배웠다.

"우리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춤을 추시고 소리북도 잘 치시는 멋쟁이였어요. 그런데 발을 약간 절어요. 그래도 춤추면 몰라...... 우리 선생님이 북을 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레를 타다가 어깨춤을 절로 추곤 했으니께. 그 북가락을 내가 배우는디 참 배우는 방법이 옛날 식이라. 선생님이 북도 내주지를 않아서 함부로 칠 수도 없고 감나무 가지 꺾어서 만든 북채를 가지고 입으로 몇 가락 배운 것을 돌담에서 혼자 돌을 두드림서 연습을 혀. 그러자니 손등이 벗겨지고 굳은 살이 박혀요. 다른 기생들은 힘들다고 다 집어치웠는데 나는 끝까지 버텼어. 선생님 눈치 봐서 기분 좋을 때 한 가락씩, 사흘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그렇게 동냥하다시피 가락을 배웠어요. 요새 사람들이 들으면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배운 거라서 꺳게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게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배운 그의 북은 그 가락의 다양함이나 기교가 뛰어남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박영구와 함께 서울에서 활동했던 명무 한성준은 승무나 학춤뿐만이 아니라 소리북 잘 치기로도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의 북춤 가락도 박영구에 견주면 '재산이 많지 않다'고 평가된다. 그것은 그의 춤을 이어 받은 한영숙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구정놀이'라고 부르는 자진모리의 여러 가락과 '세산조시'라고 부르는 휘모리의 여러 가락들은 물론 농악 장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곧, 풍물의 꽹과리 가락이나 장구 가락 그리고 북 가락 등을 북채 두 개로 두드릴 수 있게 변화시킨 가락이 대부분이다. 거기에다 이매방은 '엇머리'장단을 새로 창작하여 '재산'을 늘렸다.

"북춤 추는 시간이 삼 분에서 오 분 사이인데 남이 볼 때는 시원하고 쉬운 것 같아도 거기에다 엇붙임, 잉어거리 같은 어려운 기교를 다 익히려면 십 년 공부는 해야 돼요."

그 역시 그 어려운 공부를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공업 학교 건축과에 다닐 때까지도 계속했다. 열네 살에 명창 임방울이 주최한 명인 명창 대회에서 승무를 춘 뒤로 학교에서나 주위에서 '춤추는 머시마'라고 놀려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춤만 추었다.

그런 일과 함께 그의 성격은 더욱더 여성화되어 갔고 그 기질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 다녔다. 그는 "한국춤은 여자가 추어야 제 맛이 나고 남자가 추더라도 여성적인 태도가 우러나야 그 맛이 제대로 난다."고 하며, 여성화된 춤의 미학에 대해서 확고한 지론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것은 탈춤이나 농악을 출 때의 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승무나 살풀이를 추는 남자 춤꾼들의 거의 모두가 여성화되어 있고 여성화되지 않은 춤꾼이라도 씩씩하고 활발한 남성적 정서보다는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적 정서를 위주로 하여 춤을 추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한국의 무용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히기도 한다.

"한국 춤은 덜렁이 왈가닥은 못 춰요.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하고 어딘가 애원이 깃들어 있고, 눈에 색이 흐르고 또 그 눈에 변덕이 죽이 끓듯 하면서 왼갖 감정을 나타내어 슬프고 아름답고 어여쁘고 수심이 가득 차고, 곱게 빗은 머리에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가 살짝이 흘러 내려오듯이 교태가 있어야 그 춤이 제 맛이 나는디, 덜렁이 왈가닥이 어떻게 그 춤을 추어요? 장삼을 날리면서 그늘을 지어서 한을 만들어 내고 고깔을 좌우로 놀려서 왼갖 하소연을 해야 하는디 요새 춤추는 사람들 보면 구르고 넘어지고 몸부림치고 가랭이 쩍쩍 벌리고 궁둥이 흔들어 대니 그게 춤이예요? 지랄 염병하는 것이제."

'욕 대장', '직사포', '깡패', '따발총'이라는 많은 별명에 어울리게 그는 눈에 거슬리는 춤에 대해 매섭고 혹독한 비평을 큰 소리로 얘기했다. 그러나 그가 남을 비판할 때 무기로 사용하는 한국춤의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확신은 요즈음 새로운 각도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곧, 그러한 여성적 정서를 강조한 춤이 한국춤을 나약하고 비생산적이고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기생춤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의 말들은 그를 더욱 화나게 해서 그를 더욱 더 남성적인 욕 대장으로 만들어 주지만 이런 문제는 욕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좀더 냉정하게 이론적으로 검토되고 정리괴어야 할 문제인 듯 싶다.

문제야 어떻든지 간에 그는 더욱더 여성화되어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을 따라 북경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에 중국의 유명한 무용수 매란방에게 부용을 잠깐 배운 뒤로는 매란방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을 만큼 깊이 빠졌다.

"매란방하면 우는 아기도 그친다던 유명한 무용가인데 남자예요. 기가 막힌 미남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여자 역할만 맡아서 여자춤을 추면 여자고 남자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버린다니까요. 오죽하면 일본 천황이 반해서 자기 앞에서 춤을 추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까요. 중국 평민들은 얼굴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이 공연하면 황제 귀족들만 와요."

해방이 된 뒤에 목포 권번의 무용 선생으로 있던 시절,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 기생들한테 '뚜드려 맞기도' 많이 하다가 악극단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창공」이라는 단체를 따라다니며 밴드 반주에 맞춰서 승무를 추기도 했다. 그 뒤 광주 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전라 남도 경찰국 선무 공작반의 무용단 단장이 되어 전남 일주 순회 공연을 하기도 하고, 임방울이 만든 단체를 따라다니며 춤을 추기도 했다. 6.25 직후에는 육군 군예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부산 유지들의 권유를 받아 부산 국악원의 무용 강사 노릇을 하는 따위로 쉴 새 없이 떠돌아 다니며 춤을 췄다.

그러면서 북을 하나 놓고 치는 전통적인 외고 형식을 나름대로 바꾸어 보기도 했다. 1948년에 임방울이 목포 역전 가설 극장에서 명인 명창 대회를 열었을 때는 북을 셋 놓고 치는 삼고를 선보였고, 1953년에 전라 북도 군산에서 국악원 주최로 명인 명창 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구고(九鼓)를 선보였다. 1954년에는 서울 계림 극장에서「심상 여성 국극단」의 창극에 특별 출연하여 칠고를 선보였으며, 1955년에는 광주 극장에서 <이매방 무용 발표회>를 열어 오고를 선보였다.

"요새 사방에서 북춤들을 많이 추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래서 작년에 <북소리>라는 발표회를 열어서 북춤이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정리해 보았어요.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놨으니까 하는 얘긴데, 외고나 삼고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허지만 오고나 칠고, 구고, 십일고로 넘어가면 예술적인 면보다는 쇼적인 변이 강해요. 손님들한테 잘 보일려고, 박수를 얻어 낼려고 징그럽게 교태를 부리기도 하고요. 사실 요새 여자들이 추는 북춤은 주로 관광업소나 나이트 클럽 같은 데서 술취한 사람들의 눈요기거리로 변했잖아요?"

젊어서 쇼무대에 나섰더라면 떼돈을 벌었을 터이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본격 무대에서만 춤을 춰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그 뒤로는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면서 무용 발표회를 열고 외국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해외 공연을 하고 국내의 중요한 무용 공연에는 어김없이 출연하면서 그 명성을 높여 와 이제는 웬만한 춤의 문외한도 승무와 이매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위를 굳혔다.

"내가 관운이 없을라는지 문화재법이 생겼을 때 마침 일본에 가 있어서 지정을 못 받았어요. 거의 이십 년 전이니까 물론 나이도 아직 어려서 그랬겠지만 아직까지 질질 끌어오는 게 뭔가 관운이 없나 봐요."

관운만 없는 게 아니라 재운도 신통치 않아서 평생 춤추고 살아온 결과로 마포구 아현 3동에 있는 서른 평짜리 연구실과 궁색한 살림살이밖에 남은 게 없다는 그이지만 돈과 처세에 무능한 자신의 성격을 별로 탓하는 기색도 없다.

"어느 기자가 어떤 무용과 교수 집에 한 번 갔다가 뒤로 넘어지게 놀랐대요. 그 집에 대통령 집보다도 더 으리으리하고 궁궐 같았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집에 와서 보고는 또 한 번 놀랐대요. 그 집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고 가난해서 그랬대요. 그래도 나는 웃어요. 어수룩한 예능계에서 남 등쳐 먹고 돈 벌어서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난 못해요. 그게 어디 예술가입니까? 사기꾼 날강도지."

울분만 끓어오르면 술을 마시고 직사포처럼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해대는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고 몸도 많이 상한 그는 오 년 전에 그 좋아하던 술을 딱 끊어 버렸다. 술을 끊으니 성질도 변해서 남의 욕도 덜하게 되고 제자들 가르칠 때에도 예전처럼 무섭고 사납게 굴지 않고 많이 부드러워졌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 신식 문물보다는 옛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노래도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좋아한다. 신식 노래라고 해야 겨우 고복수, 황금심,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정도고 요새 노래에는 아예 귀를 열지 않는다.

"춤도 그래요. 원형과 기본을 버려서는 안 돼요. 아무리 창작도 좋지만 어떻게 한국춤의 기본이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태권도 같은 현대 무용으로 변합니까? 창작을 하더래도 원형을 지켜 가면서 조금씩 해야지...... 요새 젊은 무용가들의 춤을 보면 이게 춤인지 지랄발광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예요."

이렇듯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옛 것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도 요새 와서는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너무 바뀌어서 도무지 그의 고집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이다.

"요새 대학생들은 승무 추면 다 졸아요. 승무에서 염불 장단이 제일 멋있고 춤도 맛이 진진한 법인데 염불 장단만 나오면 다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북을 치면 그때야 박수가 나와요. 요새는 뭐든지 빠르고 미친놈처럼 흔들어 대야 좋아하니 원춤대로 추다가 손님 다 가버리고 나 혼자 추면 뭐 해요?"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혼자서 추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런 걱정과 한을 오로지 북을 두드릴 때 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며 쓸쓸해 한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두드릴 때 그의 가락이 왜 그토록 격렬하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애닳고 슬픈 울림을 주는지 조금은 알 듯도 했다.


김명곤 / 서울대 독어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86년 극단「아리랑을 창안하여 민족극 운동의 대표적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광대열전』,『꿈꾸는 퉁소쟁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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